관객을 악몽과 혼돈의 꿈길로 초대한 이명세 감독의 〈M〉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강동원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M〉은 멋있다고 평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의 〈M〉은 스크린에 빛이 투영되는 순간부터 영상미의 향연을 벌어졌다고 느끼도록 만든다. 안개가 흐르는 듯한 뿌연 도시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의 몸놀림은 심해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유연하다. 무언가 아득하고 어딘가 몽환적인 분위기는 〈M〉이 꿈에 대한, 기억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을 모르고 보아도 결국엔 느껴질 정도다. ‘영상 언어’라는 표현을 빌린다면 명백히 이명세의 영상은 자신의 미장센으로 어투를 드러내고 인물의 움직임으로 내용을 전달한다. 전작인 〈형사 Duelist〉()가 “빛의 향연”인 것에 견주어 〈M〉은 “빛나는 어둠”이라고 요약하는 이명세 감독의 의도가 스크린에서 온전히 살아난다. 덧붙여 “안개를 뚫고 빛나는 어둠”이라는 표현만큼 〈M〉을 적절히 요약하는 말도 드물다. 〈M〉은 그렇게 어디까지 꿈인지 어디부터 생시인지 모를 상황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꿈의 시원과 해몽을 온전히 논리에 맡길 수 없듯이 〈M〉을 논리로 보거나 이야기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하여 감독은 희망한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관객들이 민우가 꾸는 악몽과 혼돈을 똑같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이명세 감독은 그렇게 꿈길로 당신을 초대한다. 〈M〉은 감독이 거는 최면에 제대로 취해야 제대로 보이는 영화다.
불면에 시달리는 매혹적인 소설가
소녀가 숨진다. “나는 나중에 당신이 아주 많이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재미있는 영화를 보다가도 문득 내 생각이 나서 막 울었으면 좋겠어.” 숨져가는 소녀는 원망 없는 희망을 혼자서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소녀 미미(이연희)가 첫눈에 반하고 지극히 사랑한 남자가 등장한다. 검은 안경을 낀 소설가, 불면에 시달리는 민우(강동원)다. 신춘문예에 최연소로 당선된 소설가에 누구나 매혹될 외모를 겸비한 민우는 최근 불면에 시달린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출판사와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지만 소설은 한 자도 써지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보지만 의사의 진단은 민우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소설을 써야 한다는 민우의 부담 혹은 가벼운 우울증이 문제라는 진단이다. 의사는 ‘누군가’의 실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고 배제한다. 하지만 민우는 계속된 불안에 시달리다 급기야 소녀를 만난다.
그것이 꿈인지 아닌지, 어제인지 오늘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미미를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 민우에게 미미는 낯익은 존재지만 민우는 미미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민우는 서서히 미미의 존재를 찾아가고 기억한다. 이렇게 〈M〉은 민우가 미미를 기억하는 과정에 대한 영화다. 민우는 잊으려 했으나 민우의 무의식은 잊지 못한, 그래서 의식의 표피를 뚫고 꿈에 나타난 미미는 민우의 첫사랑. 〈M〉은 잃어버린 기억의 한 조각, 지워버린 첫사랑의 기억을 되찾는 일이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민우는 미미를 만나면서 지우려 애썼던 기억을 되찾고, 잃었던 이야기도 되찾는다. 하지만 민우의 곁에는 꿈이 아니라 현실로, 어제가 아니라 오늘에 그를 사랑하는 은혜(공효진)가 있다. 재력가의 딸인 은혜에게 민우는 모든 것이지만, 민우의 사랑은 잡히지 않는 무엇이다. 은혜는 예전의 미미가 그랬던 것처럼 민우의 곁에서 민우를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민우는 사랑의 확신을 쉽사리 주지 않는다. 마침내 은혜도 미미의 존재를 알게 되고, 꿈과 현실을 오가는 기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민우를 지극히 사랑하는 어제와 오늘의 여자들, 어쩌면 은혜는 또 다른 미미다. 민우는 무심함으로 어제의 미미를 잃었듯 오늘의 은혜를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강동원·이연희·공효진 캐스팅 제격
〈M〉은 민우의 이니셜 ‘M’이고 미미의 이니셜 ‘M’이다. 〈M〉은 또한 이름이면서 형식이다. 신비(미스터리)의 안개(미스티)에 싸인 기억(메모리)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멜로의 약자 ‘M’이다. 그러니까 ‘M’은 영화의 시원이자 약자이자 열쇳말이자 종착역이다. 하지만 이명세 감독이 이끄는 꿈길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이어진 길이 아니다. 때로는 얽히고 때로는 돌아가고 때로는 반복되는 미로다. 어디가 꿈인지 어디까지 생시인지 헛갈리는 몽환적 시간이다. 감독은 말한다. “우리가 꾸는 꿈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의 통로이며, 자기 자신을 만나는 공간이다”라고. 하지만 자신으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고, 소통의 통로는 여러 갈래로 얽힌다. 꿈처럼 뒤섞이는 영화의 흐름 속에서 반복은 그래도 매듭의 구실을 한다. 어제 꾸었던 꿈을 오늘 다시 꾸는 것처럼, 〈M〉에서도 반복은 중요한 모티브다. 민우가 미미를 만났던 루팡바(Lupin Bar)를 찾아가는 장면은 여러 번 같은 숏으로 반복되고, 미미가 민우를 숨어서 따라가는 거리의 풍경은 민우가 기억을 찾을수록 조금씩 변한다. 민우가 일식집에서 출판사 편집자 혹은 미래의 장인과 만나는 장면은 반복되면서 변주된다. 반복되는 장면은 결국엔 기억의 중요한 지층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렇게 〈M〉은 시처럼 반복과 조응의 구조를 가진다. 때때로 시간도 현실과 꿈에서 겹치거나 반복된다. 8월20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자꾸만 현실과 꿈에서 출몰한다. 영화는 소설에 가까운 장르지만, 반복과 조응의 리듬을 타면서 흐르는 〈M〉은 산문시를 보는 듯한 잔상을 남긴다.
다르게 말하면, 〈M〉은 몇 분 단위로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매끄러운 퍼포먼스의 연속이다. 훌륭한 구도의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깔끔한 미장센 속에서 유연한, 유려한 퍼포먼스가 계속된다. 배우들의 연기도 대개의 영화처럼 평이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유유히 흐르다 갑자기 튀어오르고, 멜로영화의 어법대로 진행되다 블랙코미디의 톤으로 바뀐다. 하지만 매듭이 단단하고 리듬이 유연해 흐름이 어색하지 않다. 에 이어서 〈M〉까지 함께 하면서 이명세의 페르소나 혹은 뮤즈로 떠오른 강동원은 아직 절정은 아니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명한다. 에서 아름다운 대상으로 존재했던 강동원은 〈M〉에서 꿈꾸는 주체로 변신한다. 너무 트렌디하지도, 너무 답답하지도 않아 보이는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서 나오는 강동원의 한민우는 대개는 무심한 얼굴을, 때로는 과장된 표정을, 결국엔 애달픈 눈물을 보여준다. 누구나 매혹될 남자로 강동원만큼 적절한 캐스팅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된다. 미미를 연기하는 이연희는 때묻지 않은 첫사랑의 현현으로 손색이 없다. 완벽하게 순수해서 조금은 어수룩한 구석까지 보이는 첫사랑의 ‘환상 속의 그대’를 이명세 감독은 이연희를 통해서 자연스레 그려낸다. 세 명의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인물인 혜진을 연기하는 공효진은 언제나 그렇듯 안정된 연기로 영화의 중심을 잡는다.
팬은 한 번 더 열광할 영화
〈M〉은 소설가 한민우의 ‘M’이자 영화감독 이명세의 ‘M’이다. 어쩌면 한민우는 이명세의 또 다른 이름이다. 〈M〉은 민우의 소설 초고에 대한 출판사 사장의 ‘코멘트’를 통해서 이러한 얘기를 전한다. 소설이 ‘물론’ 좋다는 전제를 깔아두고, 출판사 편집자는 “Less Poetic, More Specific”(덜 시적이고 더 구체적이었으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활자로 화면 가득히 ‘Less Poetic, More Specific’을 채운다. 우선 이것은 한민우의 소설에 대한 언급이지만, 이명세의 영화를 보는 세간의 평가에 대한 이명세의 반응이기도 하다. 구체적 서사를, 서사의 대중성을 ‘강권하는’ 사회에 대한 이명세의 뼈 있는 풍자이자 답변이다. 에 대해 이러한 비판이 나왔고 흥행에서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명세 감독은 〈M〉에서도 여전히 세간의 요구에 따르지 않았고 자신의 어법을 고수하며 시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M〉에서 이야기는 에 견주어 영화의 중심에 육박했다. 비록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친절한 서사가 아니라도 말이다. 〈M〉은 이명세 영화적 주제인 ‘첫사랑’에 형식적 실험을 결합한, 이명세 영화의 중간 결산의 성격도 지닌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 떠나는 미미가 “나는 나중에 당신이 아주 많이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 민우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명세의 꿈길을 따라서 제대로 꿈속을 헤맨 당신이라면 함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림 같은 화면에 잠시 매혹됐다가 이야기에 의문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림은 좋은데, 그래서 뭘? 최면에 빠지지 않은 당신은 그렇게 물을지 모른다. 그래도 의 팬이라면 한 번 더, 한층 더 열광할 〈M〉이다. 10월25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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