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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타는 발걸음, 심사정을 만나다

등록 2007-10-26 00:00 수정 2020-05-03 04:25

심사정과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 모은 간송미술관의 ‘현재 화파’전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전통 그림도 가을을 탄다. 클래식 마니아들이 브람스의 선율을 기억하듯이 전통 회화를 사랑하는 이들은 가을에 소슬한 바람 부는 듯한 현재 심사정(1707~69)의 산수, 화조 그림을 떠올린다. 묵직한 먹바림 속에 스산하게 우뚝 선 바위산, 음울한 정취로 가득한 숲과 계곡, 나뭇가지 위에 고독하게 앉은 들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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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중국 지식인 선비들이 그린 관념적 그림 문인화를 18세기 문화중흥기 조선의 특색에 맞게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인생은 내내 가시밭길을 걸었다. 할아버지 심익창의 과거시험 부정과 역모가 발각되면서 일찌감치 가문이 몰락했다. 벼슬길이 막혔고, 평생 집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 재능을 빛낼 수 없는 출신 환경에 대한 회한, 언제 역적으로 몰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따라다녔다. 거꾸로 그 제약은 화가 인생의 새 지평을 뚫어주었다. 평생 명·원대 문인화 그림 교과서(화보)와 틈틈이 답사한 금강산 등 이 땅 산하의 실경을 같이 견주어 분석하면서 조선 문인화풍의 기틀을 닦은 것이다. 상상해 그리는 관념산수와 진경산수, 화조, 동물 그림 등에 걸친 ‘심사정표 그림’들에는 겸재 정선 같은 호쾌한 기운과 개성은 거의 없다. 대신 특유의 애상감과 신중하면서도 옹골찬 붓질과 구도가 도드라진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화풍인 것이다.

탄생 300돌, 유일한 기념 전시

민족미술사의 명가인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열고 있는 가을 기획전 ‘현재 화파’전은 가을에 더욱 생각나는 옛 화가 심사정의 화풍을 올올이 눈으로 맛보는 호기다. 진경산수와 중국의 문인화풍이 조화를 이룬 심사정의 걸작들과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동 시기 화가들의 걸작 100여 점이 전시된다. 간송에서 심사정의 전시는 2004년에 이어 불과 3년 만에 이례적으로 다시 열렸다. 올해 현재 탄생 300돌을 맞아 열리는 유일한 기념 전시라는 미술관 쪽 설명이 아리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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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층 전시장은 현재를 중심으로 문예계의 영수였다는 표암 강세황, 대서예가 원교 이광사, 호생관 최북 등 당대를 풍미한 숱한 선비, 중인 화가들의 작품이 메웠다. 특히 일급 화가들의 산수 그림은 대부분 중국의 관념 문인화에 대한 심도 있는 수련과 분석을 바탕에 깔고 당대 조선의 경치를 재해석하거나, 필법 등에 독자적인 강약을 구사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심사정의 그림만 해도 선인이 폭포를 보는 모습이나 산중의 정자를 그린 관념적 산수 그림이 주종을 이루지만, 금강산 만폭동, 보덕암을 그린 그의 진경 그림은 과장이 심한 겸재의 금강산 그림보다 훨씬 실경에 가까운 감흥을 전달하고 있어 놀랍다. 세간에서 흔히 평하는 대로 그가 단순히 중국 화보만을 옮기는 데 치중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산하의 풍경을 그리는 진경산수에도 적잖은 관심과 애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재의 최만년작이자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길이 8m가 넘는 두루마리 그림 또한 이런 독창성을 드러내는 대작이다. 중국의 오지 사천 땅으로 가는 험난한 촉도를 그린 중국풍 관념산수지만, 바위와 산세를 표현하는 방법인 준법 12가지를 모두 풀어내면서 그의 독창적 화풍을 결산한 명품 중의 명품이다.

18세기 조선, 인문정신이 넘쳤구나

반면 ‘미친 화가’ ‘조선의 고흐’로 불리며 광기 어린 화풍으로만 알고 있는 중인 화가 최북의 경우, 세평과 달리 차분하고 정련된 문인화의 필치로 관념산수의 계곡과 정자 등을 그린 그림이 나와 이채롭다. 정양사 헐성루에서 본 내금강 1만2천봉 절경을 실감나게 묘사한 정충엽의 그림은 겸재의 영향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한다. 출품작들은 무엇보다 18세기 조선 문화에 보편적인 인문정신이 차고 넘쳤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당대 동아시아 그림 문화의 전범이었던 중국 문인화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분석이야말로 당시 조선 화가들이 갖춰야 할 보편적인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는 셈이다. 전시도록 격인 에는 최완수 연구실장이 심혈을 기울여 쓴 현재의 평전이 실렸다. 전시는 10월28일까지. 02-762-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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