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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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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의 초능력에 긴장하다

등록 2007-10-26 00:00 수정 2020-05-03 04:25

수많은 슈퍼히어로 등장해도 ‘장르’에 매몰되지 않은 미국 드라마

▣ 김봉석 문화평론가

슈퍼히어로가 할리우드를 장악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하지만 요즘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았다. 수많은 관객이 극장에서 슈퍼히어로를 만나는 것은, 단지 캐릭터의 힘만은 아니다. 슈퍼히어로가 가지고 있는 초월적인 능력, 때로는 지구를 거꾸로 돌리거나 멸망시킬 정도의 위력까지 지닌 ‘슈퍼 파워’의 스펙터클을 거대한 화면으로 즐기기 위한 이유도 크다. 만화적인 슈퍼히어로의 캐릭터는 과 을 통해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를 부여받았고, 특수효과의 발달을 전제로 할리우드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대중은 스크린의 슈퍼히어로에게서 어느 정도의 공감을 느낄 수 있었고, 블록버스터의 최고 강점인 화려한 스펙터클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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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회사원이, 고교생이, 화가가…

반면 드라마의 강점은 무엇보다 리얼리티다. 회를 거듭하며 몰입하기 위해서는 순간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대중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일 깊이 있는 캐릭터와 흡인력 있는 구성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슈퍼히어로에게서 그런 깊이를 끌어낼 수 있을까? 인기작이던 의 경우는 미국의 국민적 캐릭터인 슈퍼맨에게 ‘사춘기의 고뇌’를 안겨주었다.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인 슈퍼맨에게 시청자가 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르다’는 것을 약점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사춘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클라크 켄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의 인기는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슈퍼히어로가 좀 얄팍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다양한 슈퍼히어로가 집단으로 출연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슈퍼히어로의 활약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장 배경과 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들의 갈등을 부각시키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매주 1400만 명의 시청자를 사로잡은 의 전략 역시 그것이었다.

에는 몇 명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슈퍼히어로가 등장한다. 하지만 과 다른 것은, 가 다루는 것이 바로 슈퍼히어로의 창세기라는 점이다. 가 시작되면 이런 말이 흐른다. “최근 겉보기로는 관련이 없는 듯한 개개인들이 ‘비범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채 출현하고 있다. 지금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들은 세계를 구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화시킬 것이다.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의 변혁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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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화가 아이작 멘데즈는 환각 상태에서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텍사스의 고교생 치어리더 클레어 베넷은 어떤 상처를 입더라도 곧 치유가 되는 불사신의 몸인 것을 알게 된다. LA 경찰 맷 파크먼은 타인이 생각하는 것을 듣게 된다. 도쿄의 평범한 회사원 히로는 자신에게 시간과 공간을 제어하는 능력이 있음을 발견한다. 어떤 물체도 통과해버리거나, 모든 기계를 통제할 수 있거나, 일종의 핵폭발을 일으키는 등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관계가 운명처럼 얽히면서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정의·구원 이전에 ‘내 코가 석자’

의 프로듀서인 팀 크링이 처음 떠올린 생각은 ‘만약 대자연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종족을 진화시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였다. 사실 이건 수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나 일본 만화에서 이미 다룬 소재였다. 하지만 팀 크링은 그런 만화나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던 초보자였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마니아들이 뭔가 기발하고 특이한 면으로 접근하는 것과는 달리, 팀 크링은 보통의 시청자가 슈퍼히어로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스토리를 최대한 현실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지나치게 ‘장르적’인 쇼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의 전략이었다. 슈퍼히어로 드라마를 만든다면 열광적인 마니아들이 먼저 빠져들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마니아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오히려 시청자를 제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최근 몇 년간 만들어진 작품 중에서 최고의 공상과학(SF) 드라마로 평가받는 의 경우 200만에서 300만의 시청자가 열광했다. ‘최고’라고는 하지만, 의 대중성에 비하면 거의 5분의 1 수준이다.

는 장르의 공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팀 크링이 신경쓰는 것은, 슈퍼히어로 세계의 화려함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 때문에 오히려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능력을 가지고 있는 슈퍼히어로이지만, 그들은 외계인이나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아이작 멘데즈는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알게 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경찰인 맷은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수사에서 공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가정에 돌아와 부인의 생각을 읽고 부정을 알게 되자,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혐오한다. 의 피터 파커는 ‘거대한 힘에는 거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신조로 삼고 있다. 의 슈퍼히어로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의나 구원 같은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지금 그들은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할 위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운명을 받아들이고 더욱 거대한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아직 희망과 이상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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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히어로 영화보다 훨씬 오락적”

물론 공감만으로 슈퍼히어로 장르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는 깊이가 있는 드라마인 동시에, 탁월한 오락물이기도 하다. 는 ‘수많은 팝콘 히어로 영화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오락적’이라며 절찬을 했다. 그것은 액션보다는, 어떤 스릴러물 못지않은 탁월한 긴장감 때문이다. 는 각 인물들의 고뇌를 깊숙하게 파고드는 동시에, 인물들을 아주 정교하게 연결해놓는다. 한 인물을 파고들어가면, 다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시공을 초월하는 히로의 능력이 더해지면, 과거와 미래까지 복잡한 연쇄고리가 만들어지면서 이야기의 전개가 복잡해지고 다양한 수수께끼가 던져진다. 슈퍼히어로들을 찾아다니면서 뇌를 잘라버리는 사일로의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슈퍼히어로들을 감시하고 뒤쫓는 의문의 조직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게다가 슈퍼히어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조직이나 권력자는 단지 하나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미래를 만들어내려 한다. 이것은 거대한 음모론의 세계이자, 우리의 일상을 통제하는 ‘빅 브러더’의 세계다.

는 슈퍼히어로의 특출함이나 액션에만 열광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진지하게 새로운 ‘종’이 태어났을 때 이 세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리고 나에게 거대한 책임이 주어진 것을 알았을 때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란 질문에 흥겹게 답하는 즐거운 드라마다. 심오하지만 유쾌하고 스릴 넘치는 드라마. 이것이야말로 지금 미국 드라마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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