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봐야한단 강박 버리니 부산국제영화제 영화들이 먼저 다가오더라
▣ 남다은 영화평론가
부산국제영화제 7일째. 영화제의 끝자락, 극장 주변은 한산하다. 거의 모든 영화가 매일같이 매진인 걸 보면, 모두들 극장 안에 숨어 있는 게 틀림없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필수 성격 조건. 부지런해야 한다. 전날 밤, 영화제 기운에 젖어 술에 잔뜩 취해도 다음날 아침이면 자동적으로 일어나 극장으로 달려오는 자들에게만 기회는 있다. 그러나 나는 올해 그러지 못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하루 세 편 이상씩 꼭 챙겨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만, 최대한 그 강박을 피해버리고 싶었다. 어느 순간, 영화가 의무와 일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심신이 무척 피로해진 상태였다. 영화제에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아름다운 가을날, 바다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맛있는 회와 술을 먹고 가끔씩만 극장을 기웃거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게으른 여행. 그것이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온 개인적인 목적이다.

어쨌든 그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룬 것 같다. 오늘까지 총 여섯 편의 영화밖에 보지 않았다. 영화제에 와서 선택한 여러 편의 영화들 중, 마음을 온통 흔드는 영화를 건지기란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올해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영화를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니 영화가 내게 다가온 것인가? 어쨌든 특별한 계획도 없이, 솔직히 말하자면, 티켓이 구해지는 대로 게으르게 영화를 선택했다. 여기 그 영화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넋을 잃게 한 의 첫 장면
허우샤오셴의 을 보았다. 한 꼬마가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내가 가진 걸 다 줄 테니 내게 올래?” 한참을 애원하던 이 귀여운 꼬마가 지하철역으로 사라진 뒤, 카메라는 천천히 꼬마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대상으로 이동한다.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빨간 풍선. 빨간 풍선은 여유롭게 파리의 도심을 관조하듯 하늘과 땅을 부유하고 카메라는 오랫동안 풍선의 동선을 따라간다. 사람들은 풍선을 무심하게 지나치거나,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하철을 탄 아까 그 꼬마 앞에 빨간 풍선이 살랑살랑 유혹하듯 다시 나타난다. 이렇게 영화가 열리는 순간, 나는 거의 넋을 잃고 말았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경지가 그 안에 있었다. 파리의 시간을 관찰하는 빨간 풍선의 시간. 풍선은 영화 속 사람들을, 도시를, 카메라를 그리고 영화 밖의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그 풍선의 쓸쓸한 시선은 그 시선과 마주한 자를 완전히 매혹시킨다. 알베르 라모리스의 단편인 에서 영감을 얻은 이 영화에서 허우샤오셴은 지금 파리에서 산다는 것의 어떤 풍경을 담아낸다. 삶에 지친 히스테릭한 여인 수잔과 그의 아들 시몽, 그리고 시몽을 돌봐주는 중국인 유학생 송팡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일상은 피로하게 반복되는데, 마치 그 일상을 관찰하는 듯한 빨간 풍선의 시선은 그 반복에 틈을 만든다. 허우샤오셴이 파리의 시간에 빨간 풍선의 시간을 통해 성찰하는 어떤 영화적 시간.
그러고 나서 장률의 를 보았다. 을 지난해에 본 영화들 중 가장 가슴 아픈 체념의 형상화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서 그가 얼마나 더 고통스럽게 나아갈지 궁금했다. 황량한 초원을 지키는 몽골 사내와 탈북한 여인과 그의 아들의 이야기는 때보다도 더 벼랑 끝에서 시작한다. 장률은 여전히 인물의 움직임을 기다려주고 인물이 화면 밖으로 나가면 그를 따라간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컷을 나누는 대신 카메라를 좌우로 이동한다. 이를테면 한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의미 없는 빈 공간을 휙 지나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그 인물을 지켜보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동일한 시간을 사는, 그러나 서로 맞닿을 수 없는 양끝에 위태롭게 걸쳐진 두 개의 삶. 여인의 절박한 뒷모습을 핸드헬드로 쫓아가는 의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여주인공에게서도 반복된다. 그런데 메마른 초원에 실패를 알면서도 나무를 심는 남자와 험난한 여정 끝에 “앞에 큰 길이 보여요”라고 말하는 소년의 음성에는 의 체념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있다. 삶이 더욱 고달파진 만큼, 그 삶을 산다는 것의 의지도 더 강해졌다. 에서 “고향에 언제 돌아가요?”라고 물은 뒤, “그럼 언제 여기로 돌아와요?”라며 삶의 굴레를 표현했던 소년은 에서 말한다. “초원도 보호를 받는데 우리도 보호를 받아야 되잖아요.” 장률의 소년들은 삶을 철학한다.
클로드 를루슈의 은 무척 재미있었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인물들을 마구 흩어놓은 뒤, 이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는데, 이걸 아주 말이 되게, 그것도 아주 흥미롭게 해내는 영화다. 스릴러의 외피를 쓴 영화답게 여기저기 비밀의 단서들을 흘려두고서 그 단서를 배반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각 인물들의 비밀이 의심되고 겹쳐지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방식이 치밀하다. 적재적소에 유머와 긴장의 지점들을 배치해서 보는 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이 사랑스러운 영화의 일등공신은 단연 도미니크 피농이다. 고백하자면, 영화의 도입부, 질베르 베코의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도미니크 피농이 운전하는 차가 도로를 하염없이 달리는 순간부터 나는 이 세련된 영화에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다.
타이 영화, 아딧야 아사랏의 은 비극적인, 그러나 고요한 러브 스토리로, 쓰나미가 휩쓸고 간 뒤 사라진 것들, 무너진 것들의 흔적이 유령처럼 남아 있는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 정지된 시공간을 복원하는 희생제의처럼 보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영화는 이상하지만 인상적인 기운에 휩싸인다. 남녀의 지루한 소통 과정에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그러한 기운의 형상화에 처음부터 몰두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나이스 바르보 라발레트의 은 몬트리올 빈민가, 어느 가정의 버려진 아이들을 담아낸다. 켄 로치의 성장영화만큼 가슴 아프고 보다는 절망적인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버려진 아이들의 얼굴에 밀착한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아이에게 ‘너의 삶에 희망은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지 못한다. 2007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왕취엔안의 에는 건강한 힘과 정직함이 있지만, 몽골의 투박한 여인네들에 대한 인류학적인 보고서 정도에서 만족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가 퍼붓고 나니 가을이 왔구나
이렇게 영화들을 보았다. 그중 몇 편, 혹은 어떤 장면들을 보는 동안은 무척 행복했고, 비가 억수로 퍼붓던 어느 날에는 우비를 입고 야외 상영작에서 영화 음악을 들었다. 여전히 여름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던 부산은 몇 차례 비가 지나간 뒤, 어느새 완연한 가을로 들어섰다. 영화제와 함께 무르익은 이 가을. 소란스러웠던 부산의 밤은 조용하게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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