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추격신의 쾌감이 강렬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마지막 한 방을 위해서 100분을 기다려도 아깝지 않은 영화가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는 마지막 추격신의 짜릿한 쾌감을 위해서 기다린 100분 가까운 시간이 아깝지 않다. 다만 쾌감이 스치고 난 다음에 누군가는 플롯에 의문을 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러한 의문을 지우려 애쓸 수도 있겠다.
“100% 데스 프루프”라 불길한 자동차
텍사스주 오스틴, 미녀 삼총사의 수다가 시작된다. 지역 라디오 DJ 정글 줄리아(시드니 타미야 포이티어), 알린(버네사 펄리토), 셰나(조든 래드)는 자동차를 타고 휴가를 즐기러 호숫가 별장으로 가는 중이다. 섹시한 아가씨들은 별장으로 가는 길에 동네 바에서 술을 마시며 떠들고 즐긴다. 하지만 해골이 그려진 자동차를 가지고 그들을 따라다니는 자가 있다. 아가씨들이 웃고 즐기는 바의 한켠에서 스턴트맨 마이크(커트 러셀)는 이들을 조용히 관찰하고 은근하게 다가간다. 하지만 아가씨들은 자신들의 차를 타고 떠나고, 마이크는 바에서 만난 팸(로즈 맥고언)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나선다. 마이크가 “100% 데스 프루프”라고 소개하는 자동차는 왠지 불길한 기운을 풍긴다. 워터 프루프(Water Proof)가 방수(防水)를 뜻하는 것처럼 데스 프루프(Death Proof)는 방사(防死)를 뜻한다. 하지만 데스 프루프는 운전석에만 한정된 이야기. 마이크가 자신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난폭한 운전을 하면서 팸은 처참하게 숨진다. 하지만 이것은 예고편. 마이크의 자동차는 줄리아, 알린, 셰나가 탄 자동차를 쫓는다. 이윽고 다리가 떨어져나오는 끔찍한 장면이 연출된다. 사고의 형식을 가장한 살인이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데스 프루프’를 탄 마이크는 부상을 입을 뿐 죽지 않는다. 마이크의 동기는 명확지 않다. 코미디의 어투에 빌리자면 “아무 이유 없어!”에 가까워 보인다. 그저 ‘변태 성욕’쯤으로 추정될 뿐, 동기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맥락에서 동기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인과관계의 연결고리를 촘촘하게 따지지 않는 B급영화의 정신으로 만들어진 의 한계이자 매력이다. 그러한 동기를 따지는 대신에 화면에 담긴 분위기를 느끼고, 농담을 즐기는 편이 를 감상하기에 훨씬 좋은 방법이다.
동시상영관 영화의 흔적도 ‘일부러’ 남겨
원래 는 의 부분 혹은 절반이었다. ‘그라인드 하우스’(Grind House)는 선정적인 영화를 상영하는 동시상영관을 뜻하는 말이다. 동시상영관의 B급영화 정신을 자양분으로 성장한 쿠엔틴 타란티노와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오래된 필름 분위기의 ‘동시상영’할 영화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했고, 그 결과가 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의 이름으로 상영됐던 영화는 한국에서 와 로드리게즈 감독의 로 나뉘어 개봉한다. 이렇게 동시상영의 취지는 사라졌으나 동시상영관 영화의 흔적은 남았다. 의 화면에는 비가 내리고, 필름을 일부 잃어버린 것처럼 화면이 끊어지고, 상영 실수처럼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여기에 자막은 고색창연하고, 대화는 끊어진다. 상영 실수도, 필름 유실도 아니고 ‘일부러’ 동시상영관에서 상영되던 B급영화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의도된 연출이다. 영화 천재이자 악동인 타란티노의 기질은 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아무리 스크린에서 허름한 동시상영관의 분위기를 연출해도 우아한 개봉관에서 영화를 본다는 현실은 강력해서, 감독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렇다고 치자’는 이상의 느낌은 살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동시상영관 영화의 분위기를 고집한다. 그리고 어느새 영화의 분위기는 스크린을 넘어서 객석에 스며든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돌아보면, 이러한 장치가 아니었다면 는 내용과 형식이 따로 노는 어색한 영화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영화의 초반부에 배치한 이러한 ‘장치들’은 영화의 내용과 어울리며 설득력을 강화한다. 특히 흑백에서 컬러로 갑자기 화면이 바뀌는 장면은 색다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같은 장면이 색감에 따라서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새삼 놀란다. 영화의 곳곳에서 할리우드 장르영화에 오마주를 바치는 타란티노 감독의 방식은 에서도 여전하다. 오래된 할리우드 액션스타 커트 러셀의 이미지를 악당으로 뒤집은 것처럼, 타란티노는 역시나 장르영화의 전통을 반복하되 변형한다.
첫 번째 사고가 일어난 14개월 뒤, 테네시주 레바논. 이번엔 4명의 여성이 자동차 안에서 수다를 떤다. 배우 린지 로한의 메이크업 담당인 애버나시(로자리오 도슨), 패션지 모델을 할 만큼 외모는 예쁘지만 지성미는 떨어지는 여배우 리(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테드), 그리고 스턴트우먼인 킴(트레이시 톰스)과 조이(조이 벨), 이들은 영화 일을 하면서 만난 친구이다.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자동차광인 조이에게 440 엔진을 장착한 1970년형 닷지 챌린저는 꿈의 자동차다. 조이는 닷지 챌린저 중고차 판매광고를 보고서 시험운전을 해보고 싶어 안달이다. 결국 조이는 친구들을 끌어들여 닷지 챌린저를 시험 운전한다. 또다시 스턴트맨 마이크가 등장하고, 영화는 급속도로 절정으로 치닫는다. 조이와 친구들이 벌이는 자동차 액션신은 액션 혹은 스릴러 장르를 싫어하는 사람까지도 한순간에 빨아들일 만큼 숨가쁘고 아찔하다. 마치 내 친구가 위험에 놓인 듯한 조바심이 요동친다. 컴퓨터그래픽(CG)을 전혀 쓰지 않은 ‘생짜’ 액션이 주는 스릴이 넘친다.
컴퓨터그래픽 쓰지 않은 ‘생짜’ 액션
실제로 조이 역의 조이 벨은 의 우마 서먼, 의 샤론 스톤 대역을 한 스턴트우먼이다. 뉴질랜드 출신인 조이는 타란티노의 시리즈에서 위험한 액션을 해내 올해의 스턴트우먼 상을 두 차례나 받았다. 타란티노 감독은 스턴트맨 시상식에서 조이 벨을 배우로 기용하겠다고 호언했고, 결국엔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대역이 아니라 실제 인물로 등장한 조이는 에서 짜릿한 액션의 진수를 선보인다. 타란티노 감독은 역시나 결말에도 장르 공식을 차용하고 뒤집는다. 슬래셔 장르의 희생자 이미지를 전복하는 것이다. 어쩌면 단순해 보이는 뒤집기는 스릴감 넘치는 연출과 어우러지면서 예상을 뛰어넘는 쾌감으로 증폭된다. 물론 타란티노 영화답게 에는 사지육신이 찢겨나가는 장면이 빠지지 않고, 정치적으로 그다지 올바르지 않은 말들도 나온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일종의 반복이자 호응의 구도로 짜여 있다. 마지막 20분의 질주를 위해서 90분이 넘는 예열은 너무 길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을 품지 않는 관객이라면, 올해 최고의 엔딩으로 를 꼽을 수도 있겠다. 특히 더위에, 세상에 지친 여성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선사할 것이다. 9월6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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