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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처녀 캔디, 커밍아웃하다

등록 2007-08-31 00:00 수정 2020-05-03 04:25

독만 남은 서른넷 ‘취집주의자’ 그린 SBS 드라마

▣ 강명석 기획위원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서른넷이 되도록 결혼은 못했고, 직장에서는 월급도 제대로 안 나오며, 집에는 사고만 치는 가족들이 한가득이다. 서른넷 캔디의 탄생? 아니, 그래서 독만 남은 서른넷 ‘취집주의자’의 탄생. SBS 의 수정(엄정화)은 캔디 같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취집(취직과 시집의 합성어)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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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는 “서울대 법대 들어가면 사귀어준다”는 말만 믿고 정말로 서울대 법대까지 합격하며 자신을 쫓아다닌 만수(오지호)도 사법고시 3차에 탈락한 것을 알고 결혼식장에서 “혈통 없는 개” 운운하며 배신했다. 서른네 살이 된 지금도 남자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몸매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관장약이라도 써서 다이어트를 하고, 결혼정보 업체에 다니는 친구 필숙(유혜정)을 조르고 졸라 자신과는 경제적인 ‘레벨’이 맞지 않는 남자를 골라 줄기차게 맞선 보고, 줄기차게 차인다. 필숙은 캔디가 약한 모습으로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일으켰다고 충고하지만, 진짜 캔디는 그렇게 기다릴 수 없다. 나이는 한살 한살 먹어가지, 갈수록 생계는 빠듯하지. 그래서 대신 ‘얼치기 팜므파탈’이라도 돼서 조건 좋은 남자를 잡아야 한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 수정의 ‘평생 꼬봉’이었던 영애(안선영)의 손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든 걸 설명한다. ‘평생 꼬봉’도 ‘변호사 남편’ 만나면 ‘사모님’ 된다.

‘생계형 악녀’ 툭 까놓고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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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문화방송 이래 이어진 ‘30대 노처녀 드라마’를 새롭게 변주한다. 기존의 드라마 속 노처녀들이 재벌 2세와 사귀면서도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외쳤던 것과 달리, 수정은 툭 까놓고 현실을 인정한다. 능력 없고 나이 들었으면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조건 좋은 남자 잡으라고.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아니면 마흔에 가까워질수록 생계를 꾸리기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은 캔디를 ‘생계형 악녀’로 만든다. 수정에게 10여 년 동안 모은 적금 4천만원을 한 번에 날리는 아버지와 학비를 대야 할 동생, 그리고 5천만원 사채 빚을 들고 나타난 어머니가 없었다면 과연 수정은 만수를 배신했을까. ‘28살’ 수애가 30살 여성을 연기하는 문화방송 에서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는 야구선수인 연하의 남자친구와 온갖 역경을 딛고 결혼하려다 연상의 여인은 그의 미래를 생각해 스스로 포기한다. 그러나 은 ‘생계’를 위해서라도 조건을 안 따질 수 없고, 그렇다고 진짜 팜므파탈처럼 영악하게 남자를 유혹할 수도 없는 여성들의 갑갑한 현실을 유머를 섞어 ‘밉지 않게’ 변호한다. 수정은 자신에게 배신당한 뒤 절치부심 살을 빼 50억원대의 재산을 가진 미국 프로골프(PGA) 인기 골퍼가 돼 돌아온 만수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대놓고 그에게 아직 자신을 사랑하지 않냐며 보챈다. 물론 그런 수정의 모습은 그가 저지른 과거사와 겹쳐 뻔뻔스럽지만,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남자를 유혹하는 대신 몸매를 예쁘게 보이기 위해 복대를 찼다가 호흡 곤란으로 쓰러지는 오수정의 어설픈 유혹은 코믹하면서도 왠지 씁쓸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능청스런 술주정 연기까지 하며 뻔뻔한 수정의 캐릭터에 어설픈 느낌을 더한 엄정화의 연기도 맛깔스럽다. 특히 조건을 따지는 수정이 그저 능력 없이 결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조건 좋은 남자에 대한 욕심이 있을 뿐, 직장에서는 능력 있고, 가족에게는 헌신적인 여성이라는 부분은 신선한 접근이다. 그러나 은 초반을 지나 그가 만수와 가까워지면서 다시 ‘사랑’이라는 안전한 노선을 택한다. 수정은 ‘알고 보니’ 만수를 배신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수정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만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수정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대순(박다안)이 캔디인 척하면서 철저한 계산으로 만수에게 접근하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정이 만수와 맺어져야 할 당위성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수정은 과거에 만수를 배신했고, 만수가 돌아온 뒤에도 그가 돈이 없는 척하자 곧바로 만수 대신 재벌로 신분을 속이고 있는 사기꾼 우탁(강성진)에게 접근한다. 그러던 수정이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뜬다는 것은 그래도 그가 결국 ‘착한 캔디’였다는 변명처럼 보인다.

‘좋은 게 좋은’ 용서와 화해 허무해

과거에 만수를 배신했던 수정이 만수가 대순에게 관심을 보이자 왜 딴 여자에게 눈길을 주느냐며 분해하는 모습은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차라리 수정이 자신이 원하는 남자에 걸맞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땠을까. 만수에게 과거 일은 잊고 진심을 믿어달라는 것보다는 더 해볼 만한 싸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는 최근 현실의 디테일한 문제를 소재로 삼는 작품들이 많은 SBS 드라마의 딜레마다. 는 교육에 극성인 강남 엄마들이 소재였고, 은 사채의 세계를 다뤘다. 는 베트남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나온다. 그러나 는 강남엄마들이 개심하면서 모두 화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고, ‘사람을 구하는 사채업자’라는 딜레마를 가졌던 금나라(박신양)는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그리고 은 드라마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 여성들의 현실과 결혼의 문제를 다뤘으나, 그것을 깊이 파는 대신 두 남녀가 사랑싸움을 하는 로맨틱 코미디로 우회한다. 캔디에게 ‘커밍아웃’을 시킨 접근법은 인상적이지만, 그것이 결국 ‘좋은 게 좋은’ 용서와 화해로 포장되는 전개는 허무하다. 드라마가 현실을 관찰하는 폭이 넓어진 만큼 해결도 현실적으로 한발 더 나아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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