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민중가요 자판기’ 별명까지 붙었던 작곡가 김호철과 </font>
▣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민중가요 작곡가 김호철의 대표곡을 말하기는 어렵다. 누구는 거리에서 불렀던 혹은 를 떠올리고, 또 누구는 술자리에서 불렀던 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 밖의 누군가는 뒤풀이에서 목놓아 부르던 또는 집에 가는 길에 나지막이 읊조렸던 를 잊지 못하고, 어디선가 누군가는 요즘도 일에 치일 때마다 을 흥얼거릴 것이다. 한때 ‘민중가요 자판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놀라운 생산력을 보였던 작곡가지만, 김호철의 노래들이 제대로 정리된 적이 없었다. 노동자노래단, 노래공장, 꽃다지의 이름으로 나온 ‘테이프’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던 그의 노래들이 비로소 하나의 모음집으로 엮였다.
민중가요 모음집인 이 그것이다. 94곡의 노래 중에 몇 곡만 빼고 모두 그가 작곡한 것. 모음집은 생활곡을 담은 ‘단결의 노래’, 투쟁가를 모은 ‘투쟁의 노래’, 서정곡을 담은 ‘승리의 노래’와 ‘해방의 노래’, 4장의 CD로 구성됐다. 박준, 류금신, 박은영, 이혜규 등 민중가요 ‘카수’들이 민중가요의 고전에 새로운 음색을 입혔다. 그리하여 잡음이 섞인 음질의 테이프로 들었던 노래들이 재녹음·재편곡을 거쳐서 새로운 음질로 거듭났다. 무엇보다 다른 가수의 목소리로 익숙한 을 작곡가 김호철의 목소리로 듣는 즐거움이 모음집에는 있다. 1980년대 김호철의 작곡가 데뷔곡 〈X에게〉부터 90년대 ‘공전의’ 히트곡 를 거쳐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신곡 까지 김호철의 20년, 노동가요 20년이 빼곡하다. 김씨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새로운 모색을 위해서 부끄럽지만 모음집을 만들었다”며 쑥스러워했다.
“이랜드 파업때 몇 군데 사업장만 연대했어도…”
그의 작업실이 있는 서울 사당동의 단독주택에서 만난 김호철씨는 노래 이야기보다는 세상 이야기를 먼저 했다. 그는 “이랜드 파업에서 몇 군데 사업장만 연대파업을 했어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가니까 민중문예운동도 잘되기가 어렵지 않느냐”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노동운동에서 시작해 문화운동으로 넘어온 그의 ‘출신성분’ 때문일까. 김호철에게는 노동가요의 ‘가요’만큼 ‘노동’이 중요하다.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97년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까지, 그래도 노동의 계절이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민중가요 사이트이자 인터넷 방송국인 ‘노동의 소리’를 운영하고, 민중가요를 만들고 현장을 다니면서 10년의 세월을 견뎠다. 그에게 현장을 지킨 이유를 물었다. 그는 “노동자 투쟁의 추억이 너무나 길었다. 잊지를 못한다”고 말했다. 물론 잊지 못할 추억은 두 번째 이유다. 변하지 않는 노동의 현실이 첫 번째 이유다. 그는 “우리가 보기에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자의 현실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을 덮친 자본의 광풍에 때때로 그는 “분노하면서 살았다”.
그의 말대로 떠날 사람들은 떠났다. 자신의 꿈을 찾아서, 생계에 쫓겨서 떠났다. 20년이 흐르면서 기묘한 인연도 생겼다. 그가 작곡한 의 작사가 김영환은 국회의원이 됐다. 구로에서 그가 노동자에게 음악을 가르칠 때 연극을 지도했던 김명곤도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이렇게 문화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 한자리씩 차지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김호철의 이름값이면 그들에 섞여 들어갈 기회도 없지 않았을 터. 그는 손사래를 쳤다. “유명한 대학 출신이 아니라 그들의 ‘가축주의’에 끼지 않아서 다행이다.” 억울한 민중과 더불어 사는 일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자 타고난 체질인지 모른다. 이날 그가 입은 조끼에는 ‘장애해방’ 슬로건이 선명했다. 장애인들이 집회에서 자주 부르는 도 ‘알고 보니’ 그의 작품이었다. 이날 그의 작업실에는 유난히 장애인 운동가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가 만든 민중가요는 때로 민중 속에서 변형됐다. 의 “뼈아픈 고통의 시련마저 참아 참아야 승리하리라”라는 가사는 ‘참아 참야야’ 대신에 ‘싸워 싸워야’로 바뀌었다. 장애인들이 “왜 시련을 참아야 하느냐”며 가사를 바꿔 불렀기 때문이다. 오래된 노래인 의 “해골 두쪽 나도 지킨다”도 원래는 “두쪽 돼도”였다. 그는 그렇게 노래를 통해서 민중의 정서를, 정치적 올바름을 배웠다. 시대와 호흡하려는 그의 의지는 를 개사한 라는 노래에도 녹아 있다.
와 제일 좋아해
이제는 불혹의 고개를 넘어서 지천명을 앞둔 나이다. 마흔아홉의 김호철씨는 “노동자가 퇴근해 집에 들어가 누우면 듣고 싶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모음집에 실린 같은 노래에 그런 소망을 담았다. 한편으로 김호철이 사랑하는 김호철의 노래는 무얼까 궁금했다. 그는 와 를 꼽았다. “가세~ 가세~ 내 조국 해방의 땅~”으로 시작하는 는 김애영씨의 애절한 목소리가 처연하게 어울렸던 노동열사 추모곡이다. “닭똥집이 벌벌벌, 닭다리 덜덜덜”로 시작하는, ‘김호철다운’ 노래인 는 김호철의 목소리로 모음집에 실렸다. 지식인이 들어서 멋진 노래보다는 노동자가 부르기 쉬운 노래를 만드는 것이 김호철의 장점이다. 그는 “남자는 솔을 넘으면, 여자는 미를 넘으면 부르기 어렵다”며 “누구나 부르기 쉽도록 음역을 잡았다”고 말했다.
시대의 요청에 따라서 노래를 만들었지만 후회는 없을까. 그는 “다시 그 시절이 와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쉬움은 남는단다. 그는 “현장집착주의랄까. 현장에만 매달려 멀리 보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민중문화의 꽃이었던 민중가요가 쇠락한 이유를 그는 무엇이라 생각할까. 그는 “평생 파랑새를 찾아 헤맸는데 결국엔 집에서 발견했다는 얘기가 있지 않느냐”며 “(민중문예활동가들을 위한) 생존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입 때문에 민중문예 일꾼들이 떠나갔다. 하지만 생존의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현실은 여전하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젊은 민중가요 활동가의 나이가 서른다섯. 그는 “양대 노총에 소속된 조직노동자가 150만 명은 된다”며 “한 노동자가 한 장의 음반을 사기만 해도, 아니 세 명에 하나만 사도 노동가요는 살아난다”고 호소했다. 여전히 그에겐 꿈이 있다. 민중문화예술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경기도 어디쯤 모여 살면서 농사도 짓고, 노래도 만들면서 사는 꿈이다. 오늘도 김호철이 부르는 희망의 노래는 계속된다. 참, (3만원)은 노동의 소리 홈페이지(nodong.com) 혹은 이메일(love@nodong.com)을 통해서 구매할 수 있다. 연락처 02-3482-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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