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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었으면 좋았을 백남준 미디어 두 조각

등록 2007-08-10 00:00 수정 2020-05-03 04:25

75주기 생일 전후해 열리는 경기문화재단·한국방송 기획전, 별도로 기획하며 준비 기간 내내 신경전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비디오아트의 거장 백남준(1932~2006). 이 거인의 작품 세계를 한국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많은 이들은 모니터, 브라운관들로 뒤발한 ‘괴물’부터 떠올릴 것이다. 총천연색 잡탕 이미지들이 출렁거리는 TV 모니터 수십 개를 끌어붙이거나 매어달아 만든 로봇, 자동차, 빌딩, 탑 모양 조형물들이 한국에서 백남준의 대명사가 되었다. 1980~90년대에 주로 했던 이런 비디오 작업들을 역시 80년대 이후 인연 맺은 국내 미술관이나 화랑, 방송사 등이 지겹도록 되풀이해서 틀거나 보여준 탓이다.

서구 평단에서 정작 고인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고속도로 개념의 선구자, 사용자제작콘텐츠(UCC)의 원조로서 평가받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예언가적 기질이 농후한 인물이었다. 현대음악 전공자로서 피아노를 때려부수고 소머리를 들고 설치는 행위예술에 탐닉했지만, 60년대부터 대중과 작가의 경계를 깨고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을 꿈꾸었다. 사용자가 생산하는 미디어 콘텐츠(UCC)를 이미 30년 전에 비디오 기계로 실현했다. 자석이나 큰 코일, 혹은 마이크를 텔레비전 위나 앞에 놓고 이미지를 조작하는 등의 60년대 작품이 그 선구였다. 브라운관 이미지를 대중이 마음대로 조작하고 그릴 수 있는 이미지 신시사이저는 70년대 초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까불거렸던 팝아트의 성자 앤디 워홀이 스스로 그림 기계가 되어 출세하고 싶어했지만, 백남준은 보통 사람들이 그림 그리는 기계(비디오, 미디어)를 조작하고 즐기는 환경을 만들려고 무지 애쓴 좌파였다. 브라운관을 캔버스로 만들겠다는 60년대 명제는 평생을 두고 따라다닌 화두가 된다.

미디어 조작하고 즐기는 환경을 만드려 한 좌파

백남준 미술관을 건립 중인 경기문화재단과 84년 백남준의 위성방송 퍼포먼스 을 중계했던 한국방송이 고인의 75주기 생일을 전후해 각기 2개의 기획전을 차려놓았다. 한국방송의 방송 80년 특별전 ‘백남준 비디오 광시곡’(12월30일까지, 02-739-8823~4)과 경기문화재단의 ‘백남준 참여 TV’전(8월25일까지, 031-231-8508)은 백남준 예술의 ‘겉과 속’이 한국에서 소통되는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방송 전시회는 백남준 비디오 조형물들의 덩치를 더욱 키운 기념비적 작품들로 채운 블록버스터성 전시다. 백남준 미술관을 건립 중인 경기문화재단 전시는 60~70년대 초창기 백남준이 벌인 관객 참여형 비디오아트에 초점을 맞추고 백남준 스튜디오에서 구입한 소장품들을 재구성했다. 두 전시는 통하면서도 견제한다. 두 전시회의 컨텐츠들은 역사적으로 연관되지만 전시틀은 의도적으로 상대방 전시를 밀어내고 있다.

서울 여의도 KBS홀 로비공간 400여 평에 차려진 ‘백남준 비디오 광시곡’은 현란한 스펙터클로 시선을 내리누른다. 전시장인 홀 로비공간 400여 평 사방에서 관객의 눈과 몸을 때리는, 수백 개 비디오 모니터들의 광선과 전자음악, 모차르트의 장송곡 의 선율이 울린다. 독일·미국 등의 외국 기관, 개인들로부터 빌려온 대형 비디오 작품들 천지다. 모니터 166개를 놓아 거북이 모양을 만든 대표작 은 가로 10m, 세로 6m. 구식 수상기들을 접붙여 바벨탑처럼 만든 비디오탑 는 높이 4m가 넘는다. 모차르트, 머스 커닝햄의 춤이 담긴 모니터 94개로 채운 비디오 벽화 <m200>, 모니터 64대로 지그재그 선을 이루며 벽면을 타고 넘치는 대작 <w3> 등등. 기둥처럼 도열한 비디오 덩어리들을 두고 “600여 개의 모니터가 동시다발적으로 전시된 것은 거의 전례가 없다”고 기획사 쪽은 흥분했다.



한국방송의 백남준 블록버스터는 화랑이나 국립미술관이 등록상표처럼 늘어놓았던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물 전시와 차별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출품작들을 거의 모두 외국에서 빌리고, 기존 전시의 덩치만 떡 벌어지게 키웠다. 기획자는 백남준의 전성기인 80~90년대 매너리즘기 비디오아트를 집중 재조명한다는 전시 취지를 소개하면서 전시 서문에서 ‘신비주의적 매너리즘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전시’라는 표현을 썼다. 장대한 비디오 기념물들이 거인처럼 들어찬 1층 전시장은 규모의 위용만 넘쳐날 뿐이다. 기획자가 말한 대로 ‘매너리즘 미학의 새로운 발견’에 대해 어떤 태도와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는 모호하다.

KBS홀을 채운 거대한 비디오 작품들

훨씬 작지만, 경기문화재단의 ‘백남준 참여 TV’전은 색다른 구석이 있다. 60년대 중반 일본 기술자와 같이 만든 비디오 신시사이저. 일반인들이 수동장치를 조작해 텔레비전 화면 위에서 마음껏 드로잉할 수 있도록 만든 기계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초창기 UCC 원조 백남준의 소통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전시의 첫 부분을 구성하는 연작들의 경우 자석이나 코일을 텔레비전 위에서 움직이거나 앞의 마이크에서 발음하면서 화면을 변화시키는 작업들이 보인다. 에서는 미국 전 대통령 닉슨의 말하는 모습이 TV 위 코일에 의해 찌그러지는 코믹한 모습을 틀어준다. 보스턴 지역 방송사의 협조로 70년대 초 작업했던 비디오 신시사이저 작품 은 80년대 위성 퍼포먼스의 모티브가 되었다. 60~70년대 일본 TV 방송 프로그램 장면과 존 케이지 등 다른 동료 예술가들의 작업 모습을 조작한 영상들이 재료다.
두 전시는 서로 맞붙였다면, 의미가 더욱 살지 않았을까. 쌍방향 소통을 시도한 그의 60년대 초창기 작업이 지역 방송과 협력한 70년대 신시사이저를 거쳐 80년대 위성 방송 퍼포먼스의 단서가 됐다는 것을 경기문화재단의 전시는 보여준다. ‘백남준 비디오 광시곡’전의 전시 취지와도 딱 들어맞는 부분이다. 물론 별개로 두 전시를 기획했다고 두 기관은 밝히고 있지만, 자료나 콘텐츠를 공유하기보다는 내내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는 후문이다. ‘백남준 비디오 광시곡’의 기획진은 준비 과정에서 경기문화재단 쪽에 초창기 소장 컬렉션과 아카이브 자료의 일부 대여를 요청했으나, 재단 쪽은 고인의 뉴욕 스튜디오와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단 쪽 관계자는 “한국방송이 이 시점에 갑자기 전시하고 작품 대여까지 요청해온 배경을 모르겠다”고 했다. 반면 ‘백남준 비디오 광시곡’전 기획사 쪽은 “전시품이 대부분 외국 소장품들인 만큼 기획 과정에서 경기재단 소장품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역사적 의미로 이어지는 전시회인데…

경기도미술관 김홍희 관장이 같은 경기도 산하 문화기관에서 벌이는 백남준 전시를 제쳐놓고, 한국방송 블록버스터 전시를 맡은 것도 화제다. 유족, 기획자, 지자체 사이에서 백남준 기념사업의 주도권을 놓고 알력이 사그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이렇게 두 쪽 난 백남준 전시는 여운을 남긴다. 백남준 미술관의 총책임자 자리를 놓고 몇몇 인사들이 자신이 적임자라고 공공연하게 밝히며 로비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시점이기 때문이다.</w3></m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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