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레스티 첸 감독의 싱그럽고 쌉싸래한 퀴어 성장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두 명의 남자가 있다. 이름은 캉정싱(장루이자), 위샤우헝(장샤오취안). 말 그대로 죽마고우. 위샤우헝은 아침마다 캉정싱의 창문을 두드린다. “캉정싱! 캉정싱!“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 캉정싱은 위샤우헝이 운전하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서 학교에 간다. 캉정싱은 위샤우헝이 농구하는 모습을 때로는 옆에서 지켜보고, 이따금 멀리서 훔쳐본다. 위샤우헝이 학교에서 “혹시 못 봤어?”라고 하면 친구들은 생략된 목적어가 ‘캉정싱’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 초·중·고 시절 내내 그들의 일상은 그래왔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대학에 들어갔고, 위샤우헝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캉정싱이 앉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니 캉정싱에겐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대개가 그렇듯, 겉으로 보기에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쪽보다는 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쪽이 상대를 사랑하는 비밀을 간직하기 마련이다. 대만 영화 은 그렇게 청춘의 여름을 다룬다. 그러니까 이것은 남자들의 성장영화다.
‘비밀을 말해도 넌 나랑 친구일까’
한 명의 여자가 들어온다. 이름은 후이지아(양치), 외로운 소녀다. 홍콩에서 대만으로 돌아와 언니와 함께 사는 후이지아는 캉정싱에게 끌린다. 캉정싱은 후이지아를 친구로 좋아하지만 여자친구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역시나 고전적 문법에 따라서, 캉정싱의 비밀을 후이지아가 먼저 눈치채고, “그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머뭇거리는 대답은 수긍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후이지아는 캉정싱에게 상처받은 자이자 캉정싱의 상처를 이해하는 자가 된다. 이어서 삼각의 관계망이 완성된다. 캉정싱의 마음을 얻지 못한 후이지아가 우는데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은 위샤우헝이다. 여자는 다가올 남자의 어깨에 기대서 지나간 남자 때문에 운다. 위샤우헝은 진작부터 후이지아가 좋았다. 후이지아도 위샤우헝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퀴어 성장영화에 이제는 ‘고전적인’ 삼각관계가 완성된다.
사랑받는 자는 원래 둔감한 법이다. “친구에게 못할 말이 뭐가 있어?” 무언가 감추고 자꾸만 멀어져가려는 캉정싱에게 위샤우헝이 추궁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향하는 캉정싱의 마음을 위샤우헝은 모른다. 친구 사이에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른다. ‘내가 이 비밀을 말해도 넌 나랑 친구일까.’ 캉정싱은 생각한다. 하지만 성장영화에서 비밀은 언젠가 알려질 시한폭탄이다. 그대의 질책에 이제는 고백의 절차만 남았다. 마침내 위샤우헝이 캉정싱의 마음을 눈치채던 날, 조금은 예외적인 베드신이 나온다. 남자 둘, 여자 하나, 삼각관계를 축으로 진행되는 퀴어 성장영화에서 대개 ‘남녀’의 애정신은 나와도 ‘남남’의 베드신이 나오지 않지만, 은 다르다. 은 캉정싱과 위샤우헝의 아름다운 베드신으로 퀴어 성장영화의 문법을 깨뜨린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과 의 베드신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당신이라면, 매혹될 만한 장면이다. 언제나 마지막은 부서지는 파도와 함께. 또다시 성장영화의 공식처럼 세 명은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이번엔 위샤우헝이 어려서부터 간직해온 비밀을 커밍아웃한다.
청춘영화에 걸맞은 청춘스타의 매력
이처럼 이야기는 단순하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에피소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신의 성장사를 떠올리게 된다. 푸른빛 감도는 영상이 가까이 잡아내는 청춘의 표정은 막막해서 애틋하다. 영화의 정서를 대변하는 아릿한 푸른색의 화면에 들어간 인물들의 심리묘사도 세밀하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잠든 친구의 옆에서 혼자서 다가갔다 멀어졌다 하면서 마음을 졸이는 캉정싱의 행동은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의 마음마저 흔들 만큼 서글프다. 그렇다고 이 우울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곳곳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을 장면을 배치한다. 대학을 다니며 재수를 하는 캉정싱에게 위샤우헝이 자꾸만 놀자고 보챈다. 그러자 캉정싱은 책상에 30cm 자를 대면서 옆에 앉은 위샤우헝에게 “넘어오지 마!”라고 말한다. 이렇게 은 오랫동안 쌓여온 우정의 더께를 재치 있게 활용하면서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아픔의 깊이를 더한다. 뮤직 비디오 감독으로 데뷔한 레스티 첸 감독은 20대 중반에 이렇게 능숙한 연출력으로 을 완성했다. 첸 감독은 2005년 장편 데뷔작 에 이어 2006년 으로 대만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청춘영화에 걸맞은 청춘스타의 매력은 을 뜨겁게 달군다. 캉정싱을 연기한 장루이자, 위샤우헝 역의 장샤오취안은 대만의 떠오르는 청춘 스타들이다. 근육질의 장샤오취안은 땀냄새 풍기는 청춘을 후끈하게 연기한다. 장루이자는 말하지 못하는 사랑으로 흔들리는 청춘을 막막한 눈빛으로 소화한다. 캉정싱의 눈빛에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만리장성 앞에 가로막힌 사람의 처연함이 가득하다.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해 보이는 그들의 연기 앙상블은 을 끌어가는 힘이다. 신인답지 않은 연기를 선보인 이들은 이후에 청춘스타로 떠올랐고, 비평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장루이자는 2006년 대만 금마장상 영화제에서 으로 신인남우상을 받았다. 다만 은 캉정싱과 위샤우헝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여성 캐릭터인 후이지아를 주변화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미 한국에도 ‘여름 폐인’이 존재
은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화제작의 하나였다. 당시부터 입소문이 나면서 이미 한국에도 ‘여름 폐인’으로 부를 만한 열성팬들이 존재한다. 조회 시간의 두발 검사, 이름이 적힌 교복, 콩나물 시루 같은 재수학원 등의 영화 속 대만 풍경이 한국과 다르지 않아서 성장영화에 실감을 더한다. 싱그럽고 쌉싸래한 퀴어 성장영화 은 8월2일 개봉한다. 은 개봉에 앞서 CQN명동에서 열리는 영화제 ‘CQN 섬머 컬렉션-렛츠 퀴어’에서 먼저 상영된다. 주연배우 장루이자와 장샤오취안, 감독 레스티 첸이 내한해서 7월21, 22일 CQN에서 상영 뒤 관객과 대화도 나눈다. 의 개봉은 해마다 꾸준히 제작되는 중화권 퀴어영화의 저력을 엿볼 기회다. 홍콩, 대만 등 중화권에서는 한국과 달리 꾸준히 퀴어영화가 제작되고 처럼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2006년 등 퀴어영화가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두었다. 조용한 변화가 2007년 의 흥행으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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