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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절경 천하명찰이 코 앞이었구료

등록 2007-06-22 00:00 수정 2020-05-03 04:25

군사분계선 너머 오관산과 영통사, 선죽교 돌아본 개성 유적 관광

▣ 개성=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금강산이 따로 없네!” “북한 개성 땅에 이런 경치가 있었어?”

버스에 탄 순례객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꾸불꾸불 양 창자 같은 산길을 돌다시피 올라와 한 고개를 넘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다섯 개 관을 두른 모양이라는 오관산의 올망졸망한 자태가 들어왔다. 그 양옆으로도 금강산처럼 고목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연봉들이 병풍처럼 이어진다. 북한 개성 동북쪽 교외인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들이 이 산 아래에 살았고, 연인 황진이와 서경덕이 돌아다녔다는 그 산이다. 옛적 이 산기슭을 영통동이라 했고, 산에는 ‘송도금강’이란 별칭도 붙여주었다. 단원 김홍도를 키운 대화가 표암 강세황은 큰 괴석 바위가 많은 이곳 요지경에 자극받아 저 유명한 라는 진경산수화의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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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 일대, 신선이 사는 곳

꼬불꼬불 휜 노송과 숱한 활엽수림, 삐죽 솟은 기암과 괴석들이 보이는 이 묘산 자락 한가운데에 20여 칸짜리 큰 절이 보였다. 3년 전 북한이 남한 불교 천태종의 기와 지원을 받아 복원한 명찰 영통사다. 본전인 보광원 앞마당에 고려의 대표적 석탑인 영통사 5층석탑과 동서삼층탑이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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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인들은 오관산 영통사 일대를 신선이 사는 곳이라며 그리워했다. 고려의 대시인 이규보는 “산 속의 맑은 시냇물 소리가 인간사 온갖 시비를 찧고 깨뜨려버리네”라고 찬사를 바쳤다. 투박하지만 장중한 상승감이 돋보이는 영통사 5층석탑과 저 유명한 절 들머리 대각국사비에는 고려 천태종을 세운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하고 깨우침을 얻은 인연이 깃들어 있다. 중앙부의 거탑을 중심으로 두 개의 동서 쌍탑을 좌우로 거느린 권위적인 대칭 구도 또한 영통사를 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배치 얼개로 고려 왕조의 지극한 후원을 증거한다. 고귀한 봉황 장식이 비석 글자 윗부분에 나란히 놓인 검은빛 대각국사비는 의천의 생애는 물론 당대 서예사를 일괄하는 소중한 금석문 자료다. 대각은 큰 깨달음을 얻은 부처를 말하는 것이니, 그는 타계 뒤 국가의 스승으로서 지극 정성의 칭호를 받은 셈이다. 비문을 새긴 고려 장군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글을 의 저자 김부식이 양해도 없이 고쳐 둘이 그만 원수가 됐다는 일화로도 비석은 유명하다.

지난 6월8일 오전 북한 개성 영통사 복원 3돌을 맞아 성지순례 행사가 있던 날, 이 고찰과 배후의 진산 오관산은 흐리고 안개 낀 날씨 속에서 남쪽 순례객들에게 자태를 내보였다. 순례는 남한 천태종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북한의 민화협이 공동 주관했다. 당일 코스인데도 17만원의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참가한 불자와 관광객은 500여 명. 18일 500명, 23일 1천 명이 추가로 성지순례를 한다. 개성 유적이 남한에 일반 공개된 것은 2005년 시범관광 이래 2년 만이다. 천태종이나 북한 쪽이나 성지순례를 매일 정례화하자는 기세는 매한가지. 법회 중에도 상당수 참여자들은 당간지주, 탑비, 탑, 마애불 등의 문화유산을 만지고 뜯어보느라 바쁘다. 남한에서는 보기 힘든 조형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유산적 가치가 월등한 일급 문화재들이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조탑술이 반영된 5층석탑은 얼핏 투박한 듯한 모양과 달리 볼수록 특유의 상승감과 장엄한 기운이 일품이었다. 1959년 개성의 젖줄로 판 넓은 송도저수지를 끼고 비포장 산길을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황진이의 연인으로 이름 높은 서경덕의 무덤 앞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기념 촬영도 했다. 삭고 풍화한 무덤 비석, 초라한 봉분이다.

선죽교 위 정몽주 핏자국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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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멀리 송악산이 보이는 개성 민속여관에서 먹었다. 지역 특유의 유기(놋그릇)에 장조림, 채소무침, 조림 등을 담은 개성식 상차림이다. 300채에 가까운 도심 전통 한옥촌 중 일부인 20여 채를 외국인을 위한 숙박·식당 시설로 개조했다. 안내원은 “스위스 등의 유럽인과 일본 관광객들이 숙박체험을 매우 좋아한다. 머지않아 남조선 관광객도 투숙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식사 뒤 고려충신 정몽주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철퇴에 쓰러졌다는 선죽교로 향한다. 모두 다리 위의 정몽주 핏자국부터 확인하느라 바쁘다. 기실 선죽교 유적의 눈대목은 석봉 한호가 썼다는 다리 동쪽의 선죽교 비석과 나라가 위난에 처했을 때 땀을 흘린다는 다리 서쪽의 표충비다. 특히 18~19세기 영조와 고종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거북이 조형물 위에 비각을 세운 표충비는 조선후기 석조 공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고 걸작이다. 두 임금이 직접 쓴 어제·어필을 새겼는데, 왼쪽 영조가 세운 표충비의 글씨는 그의 총애를 받았던 일급 기술자 최천약이 직접 새긴 것이다. 만월대 동쪽의 고려역사박물관은 전시장이 4개나 된다지만, 14세기 초 세워진 최초의 종합대학 격인 고려 성균관(건물은 17세기 재건)의 제사 시설인 대성전과 공부 시설인 동무, 서무 등을 빌려 차린 것에 불과하다. 고려청자, 만월대 유물, 적조사 출토 쇠부처상, 당시 무기, 생활용구 등 1천여 점을 전시해놓았지만, 먼지 가득한 낡은 진열창에 조명시설조차 부실하다. 부엌 찬장에 식은 음식 놓듯 놓인 문화유산에 절로 한숨을 쉬는 이들이 많았다.

성균관 담장 너머 서쪽 언덕에는 옛 석탑, 비석들이 줄줄이 있다. 현화사탑과 현화사비, 불일사탑, 개국사 석등…. 성균관 대성전 앞마당에는 궁궐터 수창궁과 회경전을 지키던 용머리 장식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현화사 5층석탑은 탑 몸돌마다 온갖 정성을 다해 쪼아낸 부처와 그를 둘러싼 보살들의 정교한 부조상을 통해 이 절의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현화사의 내력을 담은 현화사 비는 돌을 점토처럼 주물러 구름 용 무늬를 측면과 전면 머리에 조각하고 멋들어진 현종 임금의 전서 친필 글씨로 비석 제목을 새겼다. 글씨 주위에 있는 해와 달의 부조 등도 매혹적인 볼거리다.

서울서 70km도 안 되는 ‘수도권’ 개성

앞서 오전 8시30분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남북한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검색하고 수속을 밟는 시간을 합쳐도 휴전선 넘은 지 30여 분 만에 시가지로 진입했다. 개성은 서울서 70km도 안 되는 수도권이다. 개성공단 뒤에 드넓게 펼쳐진 배후 공단 터 조성 구역을 거쳐간다. 민둥산에 집단주택들이 보이는 먼 풍경은 북한 농촌의 전형이다. 반면 공장터 개발 현장에 만든 격자형의 대로, 가로수, 보도블록 등은 우리 신도시 개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풍경이 헷갈리는 순간은 조금 뒤 시가 들머리의 눌러앉은 농촌 가옥, 꾀죄죄한 옷을 입은 북한 아이들을 보면서 가라앉았다. 근처 누런 보리밭의 물결이 개성 가도의 초현실적 분위기를 더욱 야릇하게 덧칠했다.

2년 전 시범관광 때처럼 성지순례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고려의 알짜 유적을 반나절 만에 섭렵하고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30여 분 동안 180도 다른 북한의 산하와 도시 풍경을 겪는다는 것, 눈앞에서 북한 사람들과 눈빛 손짓을 나눌 수 있다는 건 고밀도의 분단 체험이다. 관광비 100달러 이하 삭감과 현대아산의 관광 독점은 절대 안 된다는 북한, 50달러까지는 낮추고 현대의 관광사업을 인정하라는 정부의 줄다리기 결과가 사업의 가닥을 잡게 될 것이다. 오후 4시30분 버스가 다시 개성 남동쪽 봉동으로 가는 아름다운 포플러 가로수길을 넘어 남행한다. 개성공단을 지날 무렵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소나기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개성 유적 관광의 물꼬를 트는 길조일까, 험난한 앞길을 일러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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