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거칠지만 생생하게 예술을 찾겠다”

등록 2007-06-08 00:00 수정 2020-05-03 04:25

연출가 양정웅·안무가 홍승엽과 함께한 오페라 의 격렬한 연습 현장

▣ 글·사진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난 정말 나쁜 계집이야! 칼에 찔려 콱 죽어버렸으면…. 더러운 세상! 모두 지옥에나 가버려!”

젊은 여인 마리로 분한 성악가 김선정씨는 쥐어짜는 넋두리와 함께 몸을 뒤틀었다. 초점 풀린 듯 불안한 피아노 반주, 흐느끼는 노랫말, 격렬한 몸짓이 흐른다.

지난 5월29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4층 연습실.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정은숙) 가수들은 몸동작 연기에 진땀을 냈다. 6월14~17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알반 베르크의 현대 오페라 의 2막1장 연습이다. 는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괴팍스런 현대음악가 알반 베르크가 19세기 뷔히너의 희곡을 개작해 내놓은 걸작.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과 돈 앞에서 육체적·정신적으로 망가진 하급 군인이 광기가 도져 바람난 애인을 죽이고 자살하는 엽기 치정극이 줄거리다.

연습한 대본은 주인공인 하급 군인 보체크 몰래 바람을 피운 그의 애인 마리가 양심의 가책과 가난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감정을 울부짖듯 내뱉는 장면. 앞서 보체크는 의혹 섞인 눈길로 눈 맞은 장교에게 받은 반지를 만지던 마리의 행동을 의심하는 신을 펼쳤다. 마리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선정, 소프라노 이지은씨와 보체크를 맡은 바리톤 오승용씨가 한창 굳은 표정으로 감정을 고양시키며 자기들의 몸짓을 추스르느라 안간힘이다.

“놀랄 정도로 짚어주는 게 잘 맞아”

주역들의 발성, 몸짓 일거수일투족을 스태프석에서 노려보는 이는 뜻밖에도 국내 현대무용계의 고수인 홍승엽씨. 로 잘 알려진 이 춤의 대가가 처음 오페라 안무를 맡았다. 그는 수시로 무대에 뛰어들어가 배우처럼 지도한다. 그가 오씨를 부른다. “아 보체크 선생, 마리를 진정시킬 때 타이밍 급해요. 좀더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많이 떨어져 있어….” 홍씨가 직접 무대로 나와 오씨 앞에서 걸음을 걸어 보인다. “몸이 먼저 움직이면서 시선이 따라 들어가야 해요. 시선이 오랫동안 남게 되면 석연찮아져요. 잘라야지.”

한국 무용계의 자유인 홍씨는 이 오페라를 연출하는 극단 여행자의 대표 양정웅씨와 만난 지 한 달 남짓밖에 안 됐지만, 전격적으로 안무 담당에 캐스팅됐다. 그는 “음악에 연기의 상당 부분이 묻히는 다른 오페라와 달리 는 캐릭터의 밀도감이 더욱 중요하다. 내 임무는 안무보다 극에 맞는 동작을 다듬고 짜주는 것”이라고 했다. “성악가들이 동작에는 좀 폐쇄적이지 않을까 했는데 열린 마인드로 접근해 편안하다”고도 했다.

이제 3막 1장 ‘거울’신. 촛불 아래 술병을 들고 아들과 앉은 마리가 성경을 보면서 신세를 한탄하는 대목이다. 슬그머니 입장한 연출가 양정웅씨가 홍씨와 함께 스태프석에 나란히 앉아 세부사항을 지시했다. 그도 오페라 무대는 겨우 두 번째. 연극·뮤지컬 연출을 주로 한 그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 있을 법하지만, 뷔히너 원작의 연극 에 배우로 두어 번 출연한 경험이 있어 낯설지는 않다. “사실 연극을 먼저 하려고 했는데 다른 유명 극단이 해버려서 기회가 없었어요. 난해한 현대음악이라지만, 이 오페라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와 교감하고 통하는 작품도 흔치 않아요.”

나란히 앉은 홍씨와 연출가 양씨는 서로 팬이라고 했다.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이야기하고 짚어주는 게 잘 맞다”(홍승엽), “아주 구체적으로 동작이나 움직임을 짚어주고 보완해주는 것이 좋다”(양정웅)는 덕담이 이어졌다. 저녁 7시30분. 바로 옆 회의실에서는 완정정복 공개 세미나가 시작됐다. 서울대 작곡과 오희숙 교수와 연출가 양씨 등이 나와 의 음악세계와 한국 초연의 의미 등을 설명하고 밤늦게까지 토론을 펼쳤다. 학생, 신사, 주부 등 관객 120여 명은 거의 자리를 뜨지 않았다.

‘보체크 10인의 파파라치’의 UCC도 준비

만만치 않은 원작만큼 작품을 국내 초연하는 국립오페라단의 준비 또한 녹록지 않다. 높은 예술성에도 국내 무대에 소개되지 못한 오페라 상연을 이끄는 새 기획 ‘마이 넥스트 오페라’의 첫 번째 무대를 위해 양정웅, 홍승엽씨 외에도 오스트리아 유학파인 지휘자 정치용, 개성파 무대미술가 임일진씨가 의기투합했다. 난해한 작품을 튀는 홍보로 갈무리하는 노력도 치열하다. 공개 작품 설명회를 5월17일 열었고, 5월29일 세미나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여기에 이번 공연의 이모저모 준비 과정을 샅샅이 유튜브나 사용자제작콘텐츠(UCC) 등을 통해 공개하는 일반인 애호가 10명으로 구성된 ‘보체크 10인의 파파라치’ 팀이 활동했다. 세미나 행사장 들머리에는 이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이 붙어 있었다. 지휘자인 정치용씨와 사전 인터뷰한 내용, 극의 줄거리와 음악적 특색에 대한 코믹한 풀이글들이 눈에 띄었다. 5월23일 정치용 교수와 만나 ‘떼거리 인터뷰’를 한 뒤에는 싸이월드 홈피 (town.cyworld.com/nationalopera) 블로그에 코믹한 실전 인터뷰 내용을 담은 UCC 동영상과 뒷이야기들을 올렸다. 무대디자이너 임씨는 알루미늄, 철판, 콘크리트로 겹겹의 아치를 이룬 표현적인 미니멀 무대 배경으로 또 다른 볼거리를 준비한다.

추상화처럼 직조한 배경 화면을 무대로 도레미파솔의 상식을 거부하는 무조의 불협화음, 단말마적인 가수들의 절규 등이 잇따르는 는 컬트영화와 비슷한 테마, 줄거리, 구성을 취한다. 기존 서양음악의 낭만성, 흥얼거리는 멜로디 라인을 기대하는 것은 단념해야 한다. 대신 극중에 나오는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샅샅이 음악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오페라의 얼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 길이 남을 현대 오페라의 고전이 된 마력이 여기에 있다. 사회적 환경의 제약과 소외로 막가버리는 현대인의 의식은 주인공인 보체크와 애인 마리의 엽기적 행동과 불협화음으로 표출된다. 연출가 양정웅씨는 “상업성과 거리가 멀어 부담이 덜하다”고 했다. “예술이 오로지 시장성만으로 재단되는 요즘 공연에 정말 동시대 예술(컨템포러리)이 있었는가. 이번 시도는 컨템포러리 공연의 본령 찾기인만큼 거칠지만 참신하고 생생한 선의 작품들을 기대해달라.” 국립오페라단은 내년 에 이은 비제의 걸작 도 같은 시리즈로 무대에 올린다. 평일 오후 8시, 주말 오후 4시. 입장료 1만~9만원. 1588-7890.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