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 황진이’를 포기하고 ‘인간 황진이’를 바라보려한 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황진이는 춤추지 않는다. 춤추는 대신에 시조를 짓는다. 시조로 세상을 말하고, 삶으로 사랑을 그린다. 순제작비 100억원이 들어간 장윤현 감독의 는 그렇게 기생 황진이가 아니라 인간 황진이를 말한다. 의 인간 황진이는 양반에서 천민으로 신분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인생의 나락을 경험한 인물이다. 진이(송혜교)는 황 진사댁 별당 아씨로 평탄한 인생을 살지만, 혼인을 앞두고 파혼을 당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파혼의 사유는 진이의 어머니가 사실은 황 진사댁 정실부인이 아니라 부인의 몸종인 노비라는 것이다. 진이조차 모르고 살아온 출생의 비밀이 정혼한 한양의 양반가에 전해져 진이는 파혼을 당한다. 그리하여 황진이는 홍길동과 다른 사연으로 ‘어머니라 불러왔던 이를 어머니라 더 이상 부르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진이가 어머니라 불렀던 이를 “마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진이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된다. 진이의 선택은 슬픔에 빠져서 세상을 버리는 대신에 기생이 되어서 세상을 호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언처럼 한마디가 남겨진다. “세상을 다 내 발 아래 두고 마음껏 비웃으며 살 테다.”
그렇다고 가 신분의 추락을 경험한 인물이 자신의 재능을 무기로 세상을 휘어잡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의 앞뒤를 이어붙이면, 결국은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사랑을 얻게 되는 과정이고 한 여자가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이야기다. 여기서 한 여자는 당연히 황진이고, 한 남자는 놈이(유지태)다. 는 다시 말해, ‘그놈’으로 불렸던 사나이가 어느새 ‘그이’로 불리는 이야기다. 진이는 놈이에게 평생의 사랑이다. 그들의 사랑은 신앙에 견주면 모태신앙 같은 것이다. 세상에는 태어나자마자 꼬마 시절에 정해지는 사랑도 있다고 영화와 드라마는 가끔씩 말한다. 진이와 놈이의 사랑도 그렇게 시작된다. 황 진사댁 노비 놈이는 어린 아씨 진이를 연등행사에 데려갔다가 황 진사에게 호된 매질을 당하고 그 집을 떠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놈이가 황 진사가 숨지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황 진사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곡절 많은 인연은 이어진다. 이렇게 놈이는 에서 슬며시 사라졌다 중요한 순간마다 ‘짠’ 하고 나타난다. 놈이가 나타나는 상황은 충분한 개연성은 있지만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지는 못한다.
‘그놈’이 어느새 ‘그이’로
놈이는 일종의 의적으로 그려진다. 임꺽정의 행적에 홍길동의 꿈을 꾸는 인물이다. 놈이는 관아를 털지만, 곡식의 절반은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마을 어귀에 놓아두는 화적이다. 화적떼의 두목인 놈이는 헐벗는 백성들이 찾아오면 기꺼이 거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무인도에 낙원을 만드는 율도국을 꿈꾼다. 는 진이와 놈이의 사랑에 얽혀드는 신분의 차별을 비중 있게 다룬다. 놈이의 대사를 통해서, 진이의 인생을 통해서 계급모순에 분노하고 신분타파를 선동하는 대사들이 나온다. 하지만 세상의 모순이 그들의 사랑에 어떻게 얽혀드는지를 치밀하게 그리지는 못한다. 때때로 진이의 운명과 놈이의 운명은 헐겁게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진이와 놈이의 사이에는 희열(류승룡)이 있다. 송도 사또 희열은 진이의 마음을 얻으려 애쓰지만 쉽사리 얻지 못한다. 희열은 사랑뿐 아니라 권력마저 자신의 수중에 없음을 통탄한다. 민심마저 의적 놈이에게 기울어진 상황에 이중의 질투를 느낀다. 영화 는 그들의 삼각관계에 집중하고, 익히 알려진 벽계수와 서화담은 지나가는 인물로 다룬다.
깊이 있는 아름다움, 아쉬운 긴장감
그림은 좋은데, 긴장감이 아쉽다. 닳고 닳은 표현이지만, 를 설명하는 데 이만큼 유용한 문장도 드물다. 황진이를 연기하는 송혜교는 아름답다. 송혜교는 완벽하진 못해도 불안하지 않게 황진이를 소화했다. 가 에 이어서 송혜교가 ‘겨우’ 두 번째로 주연을 맡은 영화임을 감안하면, 송혜교는 또박또박 연기의 강약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황진이를 그려낸다. 후반으로 갈수록 안정된 연기를 선보인다. 그리하여 이번도 좋지만 다음은 더욱 기대된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다. 송혜교의 연기만큼 중요한 황진이의 한복도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에서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는 한복의 색감과 선을 선보였던 정구호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에서 다른 색감을 선택했다. 화려한 원색 대신에 청록의 조화로 은은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준다. 청색과 녹색이 검정의 바탕 위에서 빛나면서,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렇게 정구호 디자이너는 차별화된 황진이를 위해서 붉은색, 분홍색 등 화려한 색을 배제한 한복을 만들었다. 별당 아씨 진이, 송도 기생 명월이, 노련한 요부 황진이, 인물의 변화에 따라서 화장도 달라진다. 달라진 황진이의 분위기가 캐릭터를 눈으로 설명한다. 유지태도 과연 그가 사연 많은 화적 두목 놈이에게 어울릴까 하는 불안을 불식하는 연기를 해냈다. 특히 그가 연기하는 의 액션신은 간결하고 박진감이 넘쳐서 뜻밖의 쾌감을 안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연 배우들의 ‘포스’는 압도적인 장면으로 폭발하지 못하고, 영화관을 나서도 주연을 압도하는 인상적인 조연은 기억나지 않는다.
‘21세기의 여인’의 파격적 감성은 부족
영화 는 을 지은 벽초 홍명희의 손자로 북한의 대표적 작가인 홍석중의 를 원작으로 삼았다. 장윤현 감독은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견해를 밝혀왔다. 실제 는 때때로 원작에 매인 것처럼 보인다. 캐릭터의 새로움과 이야기의 의외성이 부족해 2007년형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라는 느낌을 남긴다. 그래서 “16세기를 살았던 21세기의 여인”이라는 매력적인 광고문구가 아쉽게도 영화에서 종종 실종된다. 21세기의 여인다운 파격적인 감성이 부족한 탓이다. 진이와 놈이의 사랑도, 고통도 낯익다. 영화는 공들여 인물의 이런 면, 저런 면을 비추지만, 캐릭터가 차곡차곡 쌓여서 하나의 이미지로 모아진다는 느낌도 부족하다. 때때로 대사는 인생의 곡절을 적확히 짚고 인물의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지만, 장면들이 쌓여서 인물의 표정이 다양해지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한편으로 아무리 인간 황진이에 초점을 맞추었고 예인 황진이가 영화의 중심이 아니라고 하지만, 예인으로서 황진이가 보여줄 만한 시각적 쾌감이 생략된 것은 대중영화로서 모험처럼 보인다.
바야흐로 한국 영화의 위기론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한국 영화 제작 편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흥행에 호조를 보인 시점에서 가 6월6일 개봉한다. (1997)의 장윤현 감독은 (2004) 이후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았다. 북한 금강산에서 촬영한 마지막 장면의 웅장함과 비장미는 2시간21분의 만만치 않은 러닝타임을 이겨낸 선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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