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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그 매혹적인 디스토피아

등록 2007-05-24 00:00 수정 2020-05-03 04:24

류웨이장·마이자오후이 감독이 다시 꺼낸 홍콩의 상처, 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상처받지 않은 도시가 어디에 있으랴. 또 상처받지 않은 도시인이 어디 흔하랴. 이렇듯 상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월세와 같은 것이지만, 홍콩 사람들은 유난히 홍콩을 상처의 도시로 기억하는 듯이 보인다. 최소한 우리가 아는 홍콩 영화에서 홍콩은 대부분 피 흘리는 도시였다. 로 21세기 홍콩 영화의 부활을 알렸던 류웨이장(유위강), 마이자오후이(맥조휘) 감독의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류웨이장, 마이자오후이의 공동 연출작이었던 는 제목부터 끝없는 지옥이라는 뜻을 담았고, 1편의 부제는 ‘혼돈의 도시’였다. 물론 여기서 일반명사 도시는 고유명사 홍콩을 지칭한다. 덧붙여 ‘혼돈의 도시’는 중국으로 반환될 시기에 혼돈에 빠진 홍콩을 은유한다. 아시아의 용병감독으로 시리즈 이후에 한국 자본으로 를, 일본에서 를 찍었던 류웨이장, 마이자오후이 감독이 오랜만에 홍콩으로 돌아와 홍콩 영화를 찍었다. 역시나 그들의 신작은 , 홍콩에 대한 이야기다.

여자친구의 자살, 장인의 죽음…

는 홍콩의 2003년 크리스마스에서 시작한다. 술을 마시지 않을 정도로 모범형사인 아방(진청우)은 절친한 선배형사 유정희(량차오웨이)에게 숨겨둔 상처를 고백한다. 여자친구와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아방이 돌아간 집에는 여자친구가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있다. 손목에는 스스로 그은 상처가 선명하다. 곧이어 영화는 2006년으로 건너뛴다. 이렇게 3년 뒤 아방은 상처로 술독에 빠졌고, 경찰을 사직해 사립탐정이 됐다. 굳이 시작이 2003년인 이유에 대해서 마이자오후이 감독은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홍콩은 2003년 사스(SAS)의 피해를 심각하게 입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반환의 혼돈에 이어서 사스의 공포가 홍콩의 심장을 때렸던 것이다. 덧붙여 사스가 남긴 후유증 하나, 2005년 홍콩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다. 이렇게 홍콩은 상처가 많다면 많은 도시다.

2006년, 유정희는 종군기자인 숙진(쉬징레이)과 결혼한다. 그들의 밀월도 잠시, 숙진의 아버지가 괴한에게 살해당한다. 사건의 담당자는 강력반장 유정희. 그는 장인이 돈을 노린 강도에게 살해당했고, 강도들은 돈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를 죽였다고 수사를 결론짓는다. 숙진은 무언가 의문을 느끼고, 사립탐정이 된 아방에게 수사를 의뢰한다. 아방은 사건을 파고들수록 고민에 빠진다. 유정희에게 의심을 느끼는 것이다. 아니, 영화는 아예 유정희가 숙진의 아버지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건의 재연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의 상상으로 읽힐 여지도 있다. 이렇게 는 범인이 누구일까를 좇지 않는다. 관객에게 범인이 누구일지에 대한 심증을 강력하게 심어준 상태에서 시작한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유정희는 왜 장인을 죽였을까’ 하는 것이다. 오히려 영화는 갈수록 ‘정말로 유정희는 범인일까’ 의심을 품도록 만든다. 아방의 시선에서 유정희에 대한 의심을 하나씩 확인해가면서 ‘유정희 이외에 누군가 있을 수도 있다’는 또 다른 심증을 ‘유정희는 범인이다’라는 심증과 다투게 만드는 것이다. 3편까지 치밀하게 얽히고설키면서 이어지는 시리즈를 만들었던 류웨이장, 마이자오후이 감독의 공력은 의 스릴러와 심리극을 충분히 기대하게 만든다.

상처를 어쩌지 못하는 내면을 응시

어쩌면 는 처럼 내가 아닌 사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하지만 에서 인물의 관계에서 나오는 긴장감에 주력했던 감독들은 에서는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다. 아방과 유정희의 쫓기고 뒤집는, 팽팽한 대결에서 나오는 긴장에 주력하는 대신에 그들이 지닌 내면의 상처를 응시한다. 아방은 여전히 여자친구의 자살을 떨치지 못하지만, 우연히 맥주를 홍보하는 펑(수치)을 만나서 서서히 상처를 씻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우울을 떨치지 못하고, 술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아방의 상처는 때때로 되새김질된다. 유정희의 부인인 숙진은 누군가에게 미행당한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한편으로 유정희는 예정된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서 예정에 없었던 사랑을 느끼는 딜레마에 빠진다. 고층 아파트 통유리 너머로, 아득한 디스토피아처럼 보이는 홍콩의 풍경은 그들의 내면을 대신한다. 량차오웨이, 진청우의 조합은 기대를 거스르지 않는다. 여기에 수치의 활기가 더해지고, 쉬징레이의 안정된 연기가 연기 앙상블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는 사건의 긴장감 대신에 내면의 상처에 집중하지만, 결과는 스릴러의 긴장감도 떨어지고 드라마도 약해졌다. 에서는 극으로 간결히 압축된 얘기가, 에서는 극으로 전시됐다가 대사로 부연된다. 인물들의 상처가 각별하진 못해도, 그 상처가 저 사건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설득력을 얻어서 정서적 울림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역시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영화는 곳곳에 나중에 터질 시한폭탄 같은 복선을 숨겨둔다. 여자친구가 자살하던 날 아방이 집으로 가는 길에 무심코 지나쳤던 자동차 전복 사고가 무심한 사건이 아님이, 유정희가 고이 보관해두었던 탁구 라켓이 진실을 밝히는 결정적 구실을 한다. 하지만 숨겨진 폭탄들이 펑하고 터져도 그다지 크게 놀랍지는 않다.

“중국 반환 후, 저마다의 슬픔도 유입돼”

그래도 역시나 영상은 유려하고, 음악은 비장하다. 고층 아파트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홍콩의 풍경은 매혹적인 디스토피아란 이렇다,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크린에는 빌딩만 보일 뿐 인간은 보이지 않지만, 정작 어렴풋한 스카이라인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비애다. 류웨이장, 마이자오후이 감독은 그렇게 아련한 시선으로 홍콩의 상처를 위무한다. 여기에 음악은 화면을 받쳐주기보다는 이끌면서 극의 긴장을 조절한다. 마이자오후이 감독은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중국 본토 인구가 많이 유입됐는데 그만큼 저마다의 슬픈 사연도 함께 유입됐다”고 말했다. 상성의 상처받은 영혼은 본토 출신은 아니지만 마카오에서 건너온 인물로 설정됐다. 당연히 상처받은 도시는 홍콩이면서 홍콩만이 아니다. 마이자오후이 감독은 “홍콩뿐 아니라 뉴욕도, 바그다드도 상처받은 도시”라고 말했다. 를 로 리메이크했던 할리우드 제작진이 의 판권도 이미 사들였고, 미국에서 리메이크할 예정이다. 5월3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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