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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들이 ‘이 땅’을 그린 까닭은

등록 2007-05-24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 간송미술관 봄 기획전 ‘우암 송시열 탄신 400주년 기념전’에서 만난 진경 문화</font>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우리가 이 땅 한반도의 산과 들, 강, 사람, 동물들을 보는 대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300여 년 전부터다. 그전까지 조상들은 중국 그림책(화보)에서 익힌 중국 땅의 풍경과 인물, 정물들을 내키지 않아도 그려야 했다. 조선 왕조의 사상적 근본인 유교 성리학의 뿌리가 중국에서 나왔기에, 중국인이 보는 시선을 훨씬 중요시했다. 그런데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에 이르러 조선 선비들 사이에 갑자기 이 땅의 풍경에 대한 관심이 맹렬히 치솟게 된다. 진경(眞景), 곧 우리 산하의 기운 어린 진짜 풍경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그린 그림들이 나타났다. 교과서에서 보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인왕산 그림,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 등이 그 시대 것이다. 왜 이런 시선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16세기말 글·글씨부터 선보여

한국 미술사의 보고인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봄 기획전은 이런 물음을 새삼 끄집어내면서 지난주 막을 올렸다. 전시 제목은 ‘우암 송시열(1607~89) 탄신 400주년 기념전’. 우암은 17~18세기 남인과 대립한 서인 정권의 대표자로 당시 가장 치열했던 당파 싸움의 장본인으로 지목됐던 논쟁적 인물이다. 게다가 정작 전시장에 나온 그의 작품은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물고기, 새우 그림(어해도) 아래 써준 발문 글씨가 전부다. 전시장의 다른 출품작들도 우암과 어떻게 연관지어 보아야 할지 얼핏 봐서는 종잡기가 쉽지 않다. 그림이나 글씨에서 조선 특유의 취향이 나타나는 16세기말부터 진경산수화가 본격적으로 나오는 18세기 초·중반 사이의 복잡다단한 글과 글씨 등을 다 섞어 선보이고 있는 까닭이다.

단서는 전시 도록인 머리글에 보인다. 미술관 쪽은 “우암은 율곡 이이가 중국 주자의 성리학을 조선 특색에 맞게 발전시킨 조선 성리학을 조선 후기 왕조의 주도 이념으로 확고히 정착시켰고, 이후 진경 문화의 뿌리를 마련했다”고 밝혀놓았다. 결국 전시는 서인과 노론의 지주였던 우암 송시열의 시대 문화 예술을 중심으로 이후 겸재 등이 발전시킨 진경 예술의 단면을 함께 펼쳐 보여주려는 것이 된다.

그러나 1층 들머리부터 전시장 분위기는 진경 예술의 최고 스타인 겸재 정선의 독무대로 기울어진다. 기운 펄펄한 금강산 연작 그림 속으로 관람객들은 빨려들어간다. 골기 가득한 기암괴봉, 호방하고 장쾌하게 흥건하게 찍고 긋고 쓸어내린 바위, 소나무 숲이 연속되는 등의 금강산 답사 그림들은 다른 선대 문인들의 심심한 그림들을 압도한다. 기발한 나무등걸과 까치의 배치에 찬탄이 나오는 조속의 새 그림, 유덕창의 천하걸작이라는 , 조지경의 같은 정밀한 사실 정신이 돋보이는 정물화들이 간신히 균형을 맞춘다. 나무꾼과 낚시꾼의 대화를 담은 겸재의 에는 꼬장꼬장한 한국적 표정과 조선풍 지게의 모습이 묘사되어 이명욱, 홍득구의 중국풍 와 다른 조선적 특질을 보여준다.

겸재의 그림엔 조선 선비의 자부심이

2층에서도 겸재의 소품 그림은 우아하게 빛난다. 들머리에 마당의 화초를 우아하게 응시하는 선비의 모습을 담은 와 한강변 옛 풍광을 담은 소품들, 인왕산 밑 안개 감도는 자신의 거처를 그린 등이 시선을 장악한다. “는 18세기 르네상스를 맞은 당대 문화의 자화상”이라는 강관식 한성대 교수의 표현대로 당시 ‘소중화’(小中華)를 부르짖은 조선 선비사회의 자부심과 인문적 성취를 상징한다. 물론 우암과 동시대 예술가들의 낯선 수장품들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는 산에서 내려오는 나무꾼의 모습을 세밀한 터치의 풍속화로 남겼고, 선비의 결기가 넘치는 유덕장의 통죽 그림도 있다. 글씨 중에는 송시열의 정적이자 남인의 대표자인 미수 허목의 괴이한 미수체 글씨를 볼 수 있다. 마치 풍을 맞은 듯 떨면서 쓰인 세로체 글씨는 미수의 강건한 기질을 대변하는 듯하다. 선조의 딸인 정명 공주가 쓴 이란 대작 붓글씨는 남성적인 필력과 거친 호흡 때문에 여성의 글씨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우암의 사상이 17~18세기 진경 예술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전시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관객들은 도록집 에 실린 간송학파(간송미술관을 중심으로 한국사, 미술사 등을 연구해온 학파)의 수장 최완수 연구실장과 그의 제자인 지두환 국민대 교수의 설명글을 읽고서야 우암이 진경문화의 사상적 뿌리라는 주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전시는 기실 진경 예술의 태동과 전개 그 언저리의 문화적 유행들을 보여주는 마당이다. 진경 예술의 주도자였던 서인과 노론, 이들과 대립각을 세운 남인의 글씨, 그림까지 아울러 17~18세기 조선 정치문화사의 복잡다기한 전개 과정을 실체적으로 엿보게 한 셈이다. 그 이면에 당쟁의 한가운데 있던 우암의 공과를 바라보는 간송학파와 기존 학계의 첨예한 관점 차이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의 차이를 뚫어줄 담론 소통의 물꼬는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몇몇 그림들, 갈라짐·변색 정도 심각”

한편 전시장을 찾은 일부 연구자들은 일부 출품작의 보존 상태에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중견 미술사학자인 이성미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홍득구의 을 비롯한 몇몇 그림들은 표면의 갈라짐과 변색 정도가 심각하다. 보존 상태가 나쁜 만큼 국가적 차원에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월27일까지. 02-762-0442.

*사진/ 간송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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