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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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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을 잃은 여걸식스의 몰락

등록 2007-05-04 00:00 수정 2020-05-03 04:24

여성 중심 버라이어티 쇼 꿈꿨던 ‘여걸 식스’의 폐지가 갖는 의미는

▣ 강명석 기획위원

사이판에 10여 명의 남녀가 있다. 그들은 춤을 통한 ‘신고식’으로 자신을 어필하고, 마음에 드는 상대방을 고른 뒤 게임을 벌인다. 얼마 전 종영한 SBS 의 ‘X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X맨’이 떠난 뒤에도, 한국방송 의 ‘여걸식스’는 지난주에도 사이판에서 연예인들의 커플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주말 공중파 3사 버라이어티 쇼 중 유일하게 여성 출연자들이 중심이 된다는 이유로 ‘여걸’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실상 ‘여걸식스’는 또 하나의 커플 만들기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여성 연예인들보다 더 많은 남성 연예인들이 출연했고, 반드시 남성 연예인의 화려한 등장으로 시작됐으며, ‘여걸’들이 벌칙을 받을 위기에 처하면 남성 연예인이 ‘흑기사’를 자처했다. 물론 ‘X맨’이 처음에는 게임을 방해하는 X맨을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 일종의 리얼리티 쇼였지만 커플 만들기 프로그램으로 변신했듯, ‘여걸식스’가 커플 프로그램으로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강동원 아름답다’며 내숭 집어던져

그러나 ‘X맨’은 커플 만들기 프로그램으로 변신하며 한때 김종국-윤은혜 등 ‘러브라인’을 탄생시키는 등 오락 프로그램의 유행을 주도했다. 반면 는 ‘여걸식스’가 방영되는 동안 좀처럼 와 문화방송 를 제치지 못했고, ‘여걸식스’는 결국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채 곧 폐지된다. 그러나 이는 ‘여걸’이 아닌 ‘여걸 식스’의 실패다. ‘여걸 식스’의 전신인 ‘여걸 파이브’ 시절, ‘여걸 파이브’는 매우 진보적인 오락 프로그램이었다. 조혜련, 이경실, 정선희 등 최고의 입담을 자랑하는 여성 방송인들이 함께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고, 다수의 여자가 한 명의 남자를 초대하는 ‘아름다운 만남’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콘셉트였다. 당시 어느 프로그램에서도 강동원의 ‘아름다움’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을 노골적으로 말하지 못했고, 여성 방송인이 내숭이라는 말을 집어던지고 멋진 남성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은 보기 힘들었다. 지금도 여성 중심의 토크쇼는 정선희가 진행하는 MTV 이나 문화방송 드라마넷 처럼 여전히 케이블의 영역이다.

멋진 남자 한 명에게 여자 다섯이 몰리는 구조였지만 ‘아름다운 만남’은 그런 과정에서 여성들이 주고받는 토크에 초점을 맞췄고, 그래서 여성 출연자들은 나이나 외모보다는 토크 솜씨에 따라 주목도가 달라질 수 있었다. 물론 ‘아름다운 만남’은 시청자가 여걸들에 감정을 이입할 만큼 멋진 남성 연예인이 계속 출연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여걸 파이브’가 선택해야 했던 것은 지금의 ‘여걸 식스’가 아니었다. 문화방송 이 증명하듯, 캐릭터가 좋은 프로그램은 게스트와 상관없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 ‘X맨’ 역시 정식 출연자는 아니었지만 상당 기간 출연하는 연예인들을 통해 고정적인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걸 파이브’가 ‘여걸 식스’로 바뀌는 과정에서 ‘여걸식스’는 토크쇼에서 커플 만들기 프로그램으로 바뀌었고, 여걸 수보다 더 많은 남자 연예인들이 출연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여걸들이 알아서 하던 ‘여걸 파이브’와 달리 ‘여걸 식스’는 진행은 지석진이, 웃기는 역할은 신정환·이정·김종민 등 고정 출연자가 했고, 여성 출연자들은 남성 출연자들이 커플을 선택하거나, ‘쥐잡기 게임’을 하는 동안은 그저 앉아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걸 식스’가 시작된 뒤 '여걸 식스‘의 주체가 돼야 했던 여걸들의 캐릭터는 오히려 갈수록 약해졌다. 남자 한 명을 여자 다섯이 둘러싸던 ‘여걸 파이브’는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활발한 토크가 가능했지만,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커플을 만드는 ‘여걸 식스’는 어떤 여성 출연자든 똑같이 게임을 하고, 춤을 추고, 남자를 향해 구애를 펼쳐야 했다.

이소연·최여진·전혜빈이 필요했던 이유

이는 남성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 대신 남성의 시선에 맞춘 여성들이 필요해진 것이고, 여걸들의 캐릭터들은 그에 맞춰 몇 가지 전형적인 여성들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소연·최여진·전혜빈 등은 토크보다는 남성의 주목을 받는 젊고 예쁜 캐릭터들이었고, 현영은 남성에게 적극적인 캐릭터를 희화화한 것이다. 또 그들 중간쯤에 있는 강수정은 털털한 이미지로 남성 출연자와 로맨스를 만들었다. 반면 ‘토크’에서는 경쟁력이 있지만 젊은 남성 연예인을 유혹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이경실은 여걸에서 하차했고, 한국에서 드물게 남자 MC에 뒤지지 않는 입담을 자랑하는 여성 MC인 정선희의 비중은 축소됐다. 코너의 중심이 돼야 할 여걸들의 캐릭터는 축소되고, 출연자는 지나치게 많으며, 여성 출연자는 그대로인데 남성 출연자들은 계속 바뀐다. 결국 남는 건 이리저리 유행에 따라 흔들리는 것뿐이었다. 때론 사이판 같은 곳에 가서 ‘X맨’보다 더 커플 만들기 프로그램 같은 구성을 보여주기도 했고, 여느 게임 프로그램처럼 ‘쥐잡기 게임’을 하기도 했으며, 마치 처럼 여걸들끼리 콩트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현영이 자신의 실제 나이를 공개하고 ‘쌩얼’을 보여주는 등 요즘의 토크쇼보다 더 노골적인 폭로를 보여주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폭로하는 것이 여성의 외모와 나이였다는 것은 더 이상 ‘여걸’들의 이야기가 되지 못한 ‘여걸식스’의 현재를 보여준다. 폐지가 결정되기 전까지 최근 몇 달 동안 ‘여걸식스’가 계속 콘셉트를 달리한 것은 자신만의 콘셉트를 잃어버린 오락 프로그램의 지루한 마무리 과정을 보여줬다.

시행착오 끝 재도전 성공할까

그래서 ‘여걸 식스’의 폐지는 여성 중심 버라이어티 쇼의 퇴장이라는 점에서 아쉬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다. 여성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결국 여성이 주도하지 못하는 버라이어티 쇼는 오히려 제대로 된 여성 중심의 오락 프로그램을 탄생시키는 데 제약이 된다. 그리고 제작진은 먼 길을 돌아 이제야 ‘감’을 잡은 듯하다. ‘여걸식스’의 후속 코너는 조혜련, 현영 등 기존 여걸들에 박경림 등이 참여하는 여성 중심의 버라어이티 쇼로, 캐릭터 구축을 위해 당분간 남자 게스트는 초대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한다. 여성 방송인의 캐릭터를 내세우려 했던 코너가 3년간의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다시 여성 방송인의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는 코너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과연 이번에는 이 ‘여걸’들의 도전이 성공할 수 있을까. 여걸들이 잘생긴 남자 연예인들 앞에서 또 어색한 ‘웨이브’를 추지만 않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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