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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 〈CSI〉, 가련한 미국인을 위하여

등록 2007-04-27 00:00 수정 2020-05-03 04:24

미국 드라마 열풍의 대표주자 〈CSI〉, 사실은 보수적인 애국주의 드라마

▣ 이영재 편집장

드라마 〈CSI〉 시리즈를 미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싶다.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는 범죄의 백화점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고등학교 아이들이 친구와 교사를 향해 총격을 가한다. 종교집단이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대치하는 일도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장난하듯 시민들을 조준 사격한 일도 있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던 수십 명의 학생들이 실로 참담한 죽음을 맞은 곳도 미국이다. 또 여객기가 초고층 빌딩에 충돌하는 비극도 미국에서 벌어졌다. 누구나 총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의 나라, 자유세계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나라 미국은 불행히도 내부에서 각양각색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매회 이색적이라서 상품성이 높은 강력범죄 사연들을 필요로 하는 〈CSI〉 같은 드라마의 공장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다면 몇 회 못 가서 소재가 고갈되고 말 것이다.

유형이 다양할 뿐 아니라 잘사는 나라 미국은 호화로운 범죄의 배경을 제공할 수 있다. 전쟁터나 뒷골목이나 들판에서의 살상은 상투적이다. 카지노, 해변, 호텔, 대저택, 댄스클럽 등 배부른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장소들은 극단적 폭력의 화려한 배경이 된다. 이른바 ‘미드’(미국 드라마) 열풍의 대표작 중 하나인 〈CSI〉는 물질적 부와 폭력 사건의 발생 빈도가 공히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국에서나 제작될 수 있는 드라마인 것이다.

범죄는 제정신 아닌 개인의 문제

태생을 트집 잡기는 했지만 내가 〈CSI〉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시청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론으로 부드럽게 골인하는 스토리는 일품이다. 단서와 복선과 반전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눈을 떼기 어렵다. 찌릿한 감동도 있고 인간과 생에 대한 깨달음도 준다. 또 안티 마초 범죄 드라마라는 사실은 큰 매력이고 중요한 흥행 포인트다. 말하자면 〈CSI〉는 백인 남자의 완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나 과 달리 두뇌를 무기로 범죄와 맞서는 드라마이다. 그 덕분에 여자와 흑인과 약골도 주역이 될 공간이 열리며 이런 설정의 유연성 내지 개방성은 터프가이에 질린 (그리고 미드 팬덤의 주력군인) 여성층까지 흡인하게 하는 힘이 됐다.

그러나 어떤 걸작도 그렇듯이 〈CSI〉도 불편하거나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드라마이다. 더구나 미드 열풍이 불어 상찬은 넘쳐나고 비판이 희소한 세태가 기형적이므로 우리에게는 미드의 대표 격인 〈CSI〉의 편향을 트집 잡고 성토하는 글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CSI〉 시리즈가 실상은 보수적인 애국주의 드라마라는 사실이다. 드라마가 진짜 하는 일은 시청자에게 범죄 현상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과 아메리카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드라마는 세상이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 소수의 개인이 문제라는 믿음을 유포한다. 알다시피 범죄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이 아니다. 누군가 총을 꺼내 무차별 살상을 벌였다고 해도 그의 우울증이나 치정이 최종적 원인일 수는 없다. 총기 휴대의 자유에 대한 집단적 확신 또는 총기류 산업체의 이익을 보장하는 사회 제도가 거듭되는 참사를 야기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도둑질이나 사기, 폭력도 모두 개인의 ‘손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산물이다. 그러나 〈CSI〉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멍청하거나 미쳤거나 삐뚤어졌거나 속 좁은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범죄를 창안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세상이 미친 것이 아니라 인간 몇몇이 제정신을 잃은 것이라면 큰 다행이다. 그들만 제거하거나 막아내면 세상이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이나 감옥을 더 짓는 것만으로도 훨씬 밝아질 수 있는 것이다. 범죄의 사회적 뿌리에 무관심한 〈CSI〉는 보수적이다. 진실을 고백하지 않으므로 반쯤은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노숙인·갑부 차별않는 평등 수사라니

〈CSI〉는 세상이 차별 없이 개인을 대한다는 믿음도 심어준다. 수사대 요원들의 정의롭고 단호한 성향만이 공정성의 환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 신비화된 과학이 불편부당한 사회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더 큰 역할을 한다. 수사대의 기계와 컴퓨터는 완전한 심판관이며 전지적 관찰자여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의 물증을 생산해낼 수 있다. 그리고 진실에 입각한 단죄는 하층과 부자 모두에게 공정하게 행해진다. 현실의 사람들은 엉터리 물증이 나올까 또는 수사기관 앞에서 차별을 당할까 안절부절못하고 가슴을 치기 마련이지만, 드라마 속 피의자들은 평온하다. 진실이 명명백백히 밝혀져 절대 누명을 쓰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먹고 자는 노숙인이라고 해도 〈CSI〉 수사대 앞에서는 세계 최고의 갑부와 똑같이 공정하게 대우를 받을 것이다. 드라마는 평등과 공정함과 불편부당의 천국이 이루어졌거나 곧 열리게 되리라 선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또한 허풍일 공산이 크다.

〈CSI〉는 또한 강력한 공권력을 이상화하도록 관객을 유혹한다. 드라마 속에서 수사대는 사진 한 장으로 전국 전과자 데이터베이스에서 용의자를 뚝딱 찾아내고, 자동차 유리 파편 하나만으로도 순식간에 차량 소유자를 찾아내고는 의기양양이다. 국가 기관의 컴퓨터에 시민들의 정보가 통째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면 그곳은 위험 사회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문제시하기는커녕 응원하고 싶어진다. 악당을 잡아내는 게임에서 〈CSI〉 요원들이 빨리 승리하라고 응원하는 시청자의 반응을 드라마가 생산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돌이켜보면 납득할 수 없는 장면도 지나치게 된다. 가령 지난주 방송에서는 경찰관들이 기괴한 치장의 흑인 여성을 도로에 무릎 꿇리고 총을 겨눈 장면이 있었다. 살인 용의자였던 이 여성은 뒤에 무죄인 것이 밝혀졌다. 용의자가 백인 여성이었거나 말쑥한 화이트칼라 흑인이었다고 해도 그런 설정이 가능했을까. 시청자는 〈CSI〉를 보는 동안 공권력이 더욱 강력해지길, 그리하여 악당의 혐의를 조금이라도 가진 자들을 압도하길 기원하게 된다.

미국인들을 위해 처방된 마취제 혹은 진통제

〈CSI〉가 묘사하는 살상과 배신과 거짓말의 세계는 생지옥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지옥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행복하고 편안해진다. 정의감에 넘치는 이들이 완벽한 과학기술의 힘으로 진실을 밝혀내고 소수의 미치광이를 솎아내는 〈CSI〉의 세계는 오히려 유토피아다. 드라마는 비뚤어진 범죄자들을 개별적으로 응징하면서, 범죄 현상이 미국 사회 전체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춘다. 또 보호해야 할 미국인과 폐기해야 할 소수 미국인이 나뉘고, 소수를 몰아내면 나라는 사랑할 만한 곳이 될 거라는 믿음이 샘솟도록 만든다. 이 드라마는 충격적 범죄가 빈발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가련한 미국인들을 위해 처방된 마취제 혹은 진통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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