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는 기분을 안겨주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여덟번째 유혹
▣ 남다은 영화평론가
‘영화를 사랑하는 개인의 심신에 미치는 영향’ 차원에서 볼 때, 전주영화제와 부산영화제는 다르다. 물론 영화제의 규모나 프로그램의 차이, 혹은 고속철도(KTX)의 직행 여부, 버스와 기차의 이동 시간 대비 안락함 등의 이유를 들어 나름의 논리적인 분석을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영화를 사랑하는 개인의 심신’의 문제이니만큼, 더 내적이고 서정적인 이유를 찾고 싶어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가 허락된다면, 내게 부산영화제는 의무이고 전주영화제는 여행이다.
부산에 가면 이상하게도 반드시 하루 네 편씩 영화를 봐야 될 것 같은 책임감과 의무감에 시달린다. 매년 해운대를 채워가는 고층건물에 한탄하다 바다가 눈앞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남포동에서 해운대로, 해운대에서 남포동으로 땅 밑을 기어다니기 바쁘다. 영화 한 편 놓쳐도 마치 인생 한 부분을 상실한 듯 좌절하고, 녹초가 된 몸으로 밤 11시가 다 되어 술잔을 기울일 때에야 ‘아, 내가 놀러 왔지’라고 깨닫는다. 그러나 다음날도 마찬가지의 하루. 부산영화제에 가면 나의 신체는 자동화되고 거기서 이상하게도 거부할 수 없는 마조히즘적 충동이 발생한다. 이에 비해 전주영화제는 전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을 풀어놓는다. 극장에서 다른 극장으로 이동할 때도 행여 영화 상영 시간에 늦을까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봄나들이 버스를 탄 것처럼, 심신은 한없이 산들산들 나른해진다. 하루에 영화를 두 편만 보아도 억울하지 않고 마음이 편해져서 책임이나 의무가 아닌 놀이의 자세로 돌입한다. 이건 영화에 대한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 한창 피어나는 꽃과 따스한 봄기운과 꿈에도 그리는 먹을거리들, 전적으로 그것들 때문이라고 자신을 다독인다. 전주영화제에서 나의 심신을 움직이는 것은 엄밀히 말해 영화가 아니라, 영화와 영화 사이의 풍요로운 길이다.
개막작은 ‘최초의 전주 지역 영화’
어쨌든 벌써 8회를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가 4월26일부터 5월4일까지 열린다. 부산영화제가 10년을 지나 거대한 국제 영화제로 탄탄하게 몸집을 불리는 동안, 전주영화제는 실험, 인디, 디지털, 급진, 주변부, 대안 등의 이름을 걸치고 혹은 매번 바꿔 입으며 새로움을 상상하고 미래의 영화를 꿈꾸는 영화제로 자리매김해왔다. 37개국에서 온 185편의 영화가 상영될 이번 영화제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전주의 지역색을 강화하고 대중적인 상영작을 늘려 ‘시민 중심의 영화제’로 거듭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개막작을 꼽을 수 있다. 개막작인 한승룡 감독의 는 전라북도 영상산업 육성을 위한 저예산 영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말하자면 최초의 ‘전주 지역 영화’인 셈인데, 벼랑 끝에 내몰린 인물들의 로드무비가 전라북도의 풍경 안에서 펼쳐지며, 실제로 전주 지역 출신의 스태프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에 신설된 ‘로컬 시네마 전주’라는 섹션은 전주 지역에서 제작된 독립영화들을 지원하고 그 결과를 소개하는 자리다. 올해에는 총 세 편의 극 단편 영화들과 계화도 여성 어민들의 싸움을 담은 다큐멘터리 가 상영된다. 이런 맥락에서 전주 지역의 영화단체들이 중심이 되는 학술행사들도 눈에 띄는데, HD 영화 제작을 통한 전주 영상산업의 전망, 전북 지역 대안미디어 상영배급의 전망 등에 관한 논의가 펼쳐질 계획이다. 이는 전주영화제가 단기간의 영화축제를 넘어서 지역적인 차원에서 영화·영상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무엇보다 이번 영화제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각 섹션들의 변화다. 그동안 전주영화제의 경쟁 부문이었던 ‘인디비전’과 ‘디지털 스펙트럼’이 ‘인디비전: 국제경쟁 부문’으로 통합된다. 영화제 쪽은 디지털 매체의 전복성이 주목을 받았던 초기에 비해 디지털의 고유한 의미가 약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듯, 매체의 구분 없이 영화 자체의 도전 정신에 주목할 것이라고 밝힌다. 매체의 특성이 정신을 만들기도 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진 매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정신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 어쩌면 이러한 선택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8회차 영화제가 떠안을 수밖에 없는 적절한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이 부문에서는 전세계 신인 감독들이 만든 총 12편의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상영될 예정이다. 무엇보다 올해 전주가 국제 무대에 한걸음 더 내딛기 위해 선택한 길은 오히려 한국 영화 부문을 강화해 내실을 기하는 것이다.
영화제 쪽은 “더 큰 상금을 마련해 한국 독립영화인들을 격려”하려고 ‘한국 영화의 흐름’과 ‘한국 단편의 선택’ 섹션을 경쟁부문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전주영화제의 오랜 애정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나, 영화제의 이런 선택이 가난하고 외로운 다수의 독립영화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설지에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한국 영화의 흐름’에서는 최우수작품상과 우수상, 관객평론가상 등이 신설돼, 선정된 작품들 중 일부는 영화제 이후 개봉 지원을 받게 된다. ‘한국 단편의 선택: 비평가 주간’에서도 세 편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될 예정이다. 이미 몇 차례 상영돼 이름이 알려진 등뿐만 아니라, 각 영화학교들이 배출한 올해의 신선한 졸업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여기에 올해 신설된 ‘숏! 숏! 숏!’ 섹션이 가세한다. 세 명의 감독을 선정해서 디지털 단편영화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이미 단편영화계의 스타 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세 명의 영화가 상영된다. 으로 유명한 김종관의 , 을 통해 전주영화제를 찾았던 손원평의 , 그리고 독립영화사를 설립해 를 만들었던 함경록의 가 그것이다.
피터 왓킨스 회고전에도 공들여
한편, 매해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디지털 삼인삼색’은 올해도 건재하다. 이번에는 영역의 폭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확장돼 어김없이 30분 분량의 영화 세 편이 상영된다. 바로 (2003)로 유명한 프랑스 감독 유진 그린의 , 독일의 뛰어난 미디어 아티스트인 하룬 파로키의 , 그리고 1997년 베니스영화제 촬영 부문을 수상했던 의 감독이자 포르투갈 영화계의 선두주자인 페드로 코스타의 이다. 덤으로 이 세 명의 감독이 각각 추천한 영화 (로베르 브레송, 1966), (이자벨 스테버, 2005), (스와 노부히로, 1999)가 관객을 찾아간다. 이 각각의 영화와 추천한 감독들의 영화를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이 밖에도 영화제가 올해 특별히 공을 들인 부문으로 피터 왓킨스 회고전을 꼽을 수 있다. 그동안 그 자리는 허우샤오시엔, 샹탈 애커만,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라이너 베르터 파스빈더, 글라우버 로샤, 소마이 신지, 리트윅 가탁의 풍요로운 성찬들로 채워진 바 있다. 이들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피터 왓킨스는 영화제 쪽의 소개를 따르자면 영국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대부”이다. 미국, 캐나다, 스웨덴 등지로 흩어져 감독 자신조차 행방을 몰랐던 프린트들이 모인 만큼, 올해 전주영화제의 야심찬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핵전쟁, 유럽 내 이념 갈등, 무력한 공권력 등을 다룬 (1965)은 그에게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안겨주었지만, 정작 〈BBC〉는 방영을 금지하고 그를 해임했다. 그 뒤 왓킨스는 영국을 떠나 유럽과 미국을 떠돌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될 9편의 영화 중 하나인 (1971)는 폭력의 역사로 유지되고 있는 미국에 대한 풍자가 돋보이는 작품이며, 그의 최근작인 (2000)은 파리코뮌의 역사적 순간을 다룬다. 이 작품은 당대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과 실업, 매스미디어의 문제까지 아우르는 345분짜리의 길고 긴 다큐다. 왓킨스의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가짜와 진짜를 넘나들며 발산해내는 정치성은 최근 케이블 방송의 페이크 다큐들을 즐기며 나락으로 떨어진 우리의 영혼에 통렬한 각성제가 되지 않을까? 여기에 그의 작품세계를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는 특별대담 자리도 마련돼 있다.
한편 지난해 소비에트연방 시기의 영화들에 이어, 올해 특별전에는 터키 수교 50주년을 맞이해 터키 영화들이 선보인다. 등으로 알려진 일마즈 귀니의 (1970), 의 감독 누리 빌제 세일란의 (1997)을 비롯한 터키의 숨은 걸작들이 소개된다. 특히 1997년 이스탄불영화제 최고작품상을 받은 의 감독 제키 데미르쿠부즈가 영화제를 방문해 터키 영화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체코의 거장 이리 멘젤의 특별전도 궁금하지만(전주에서 놓친 분들을 위해, 5월부터 에서 상영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무엇보다 결코 놓칠 수 없는 영화, 장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의 마지막 작품인 과 다니엘 위예 추모 상영작 두 편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평론가가 혼자만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아서 배 아프도록 얄미웠던 지아장커의 와,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를 2006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했던 알렝 레네의 신작 도 있다.
‘불멸의 밤’ 심야 영화에도 눈이가네
영화제에서 욕심은 부릴수록 끝이 없고 허기짐은 채워지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이 글의 시작에서 전주영화제의 미덕은 역시 나른한 여행에 있다고 말해놓고서, 글을 마쳐야 할 시점이 다가오니 또다시 불길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이제는 심야 상영 프로그램인 ‘불멸의 밤’에 포진한 존 워터스의 영화들과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특히 프로그래머가 추천한 와 지인이 강력 추천한 에까지 눈길이 간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도 나처럼 이토록 지지부진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가? 이 하찮은 소개글로 허기짐을 달랠 것인가, 아니면 단 한 편만 볼지라도 전주의 ‘봄. 밤’으로 과감하게 ‘소풍’(‘봄. 밤, 소풍’은 올해 영화의 거리를 메울 메인 공연 이벤트의 이름이다)을 떠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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