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팝아트의 전설이 된 이름, 앤디 워홀의 사후 20주기 기념 회고전</font>
▣ 반이정 미술평론가 dogstylist.com
사후 20주기의 추모(이기보다 경축) 열기가 생전 자신의 활동 무대보다 지구의 반대편이나 떨어진 장소에서 요란하고 성대한 연쇄 회고전으로 입증되는 현실은 앤디 워홀의 지명도를 감안할 때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1960년대 함께 주목받던 동급 팝아티스트 동료에 비해 앤디 워홀의 자리가 비중 있게 취급되고 인용되는 까닭은 그가 팝아트를 지속적으로 대표해온 사정과 연관 있다. 그가 전성기를 구가한 60년대 후반에는 리처드 페티본이 워홀의 작업을 포켓 사이즈로 고스란히 복제한 작품으로 내놓더니, 워홀 사망 20년이 못 돼 한국 화단에선 낸시 랭이 그의 주요 도상을 그대로 베껴내며 코리안 팝이라 이야기하니 말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이번 회고전 제목 ‘앤디 워홀 팩토리’에도 채택된 ‘팩토리’(Factory)라는 단어는 1963년 뉴욕에 자리잡은 그의 작업실 이름이다. 이는 예술품을 공산품 찍어대듯 대량 제조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고유성이 최상의 미학적 가치로 굳어 있던 팝아트 이전 시대, 특히 추상표현주의의 철학과 정면 대치됐다. 세상이 뭐라 하건 워홀은 공장주마냥 직원들에게 작품 제작을 지시했고, 심지어 그림에 들어갈 자신의 서명조차 조수에게 시켰다고 전해질 정도로 작가의 원본성을 훼손했다. 그런 기행 덕분에 평생 바라 마지않던 유명 인사로 그는 다듬어졌다. 1964년부터 67년까지 앤디 워홀의 팩토리 거주기를 기록한 어느 사진집 서문에는 ‘워홀 작가론’이 정리돼 있는데 다음과 같다. “앤디 워홀 생애 최고의 작품은 앤디 워홀이었다. 여느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명성을 쌓은 데 반해, 앤디는 정반대 코스를 밟았다.”
통조림·유명 인사를 무수히 ‘인쇄’
현대미술사의 특정 시기를 칭하는 팝아트는 이제 더는 특정 시기에 갇혀 사용되지 않는다. 일본의 재팬 팝, 영국의 브릿 팝, 그리고 한국의 코리안 팝은 태동한 시점 면에서 다소 상이하고 양태도 다르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늘날 꽤나 낯익은 용어가 되어버린 팝아트는 태동 단계에서 여러 유사 용어들과의 경합을 거쳐야 했고, 경쟁에서 생존한 생명력 강한 용어임이 입증됐다. 팝아트가 유행한 60년대 본토에서는 대항마로 신사실주의(New Realism), 일상품 예술(Common Object art), 아메리칸 드림 회화(American Dream Painting), 쿨 아트(Cool art) 등의 견제가 있었다. 용어의 최초 고안자로 지목되는 비평가 로렌스 알로웨이(Lawrence Alloway)는 고급 문화 비해 질적으로 하자가 많다고 간주된 대중문화의 심상치 않은 징후를 예고하며 팝아트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그때가 1958년이다. 물론 미술사에서 최초의 팝아트는 1956년 리처드 해밀턴의 작품으로 기록되지만, 본격적 전개는 1962년께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 해 7월9일은 후대 사가들에 의해 워홀이라는 인격체와 동격으로 인식된 캠벨수프 통조림 이미지 32점이 페루스 갤러리에서 워홀 개인전의 이름을 달고 출품된다. 한편, 같은 해 그의 명성에 버금가는 연작과 연작도 발표된다. 하지만 같은 해 9월13일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개최한 팝아트 심포지엄에는 팝의 지지자는 소수에 불과해 취약한 지지 기반을 감추지 못했다. 요컨대 퓰리처상 수상자인 시인이자 비평가 스탠리 쿠니츠는 워홀의 캠벨 통조림 연작이 연필을 사용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복제했다는 이유로 열정 부족이라고 맹비난했다. 워홀이 동료 팝아티스트들과 다른 노선을 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상업 예술가 전력과 관계가 있다.
‘I.밀러 구두회사’를 필두로, ‘하퍼스 바자’ 등 각종 상업 매체에 삽화를 그려주며 벤 샨(Ben Shahn)풍의 점선 드로잉으로 업계에서 이름을 쌓았고, 당대 소비자가 원하는 바를 기민하게 포착해 화면으로 옮기는 재능도 키워갔다. 단련된 상업 감각은 이후 대중 소비재에 불과한 인스턴트 통조림과 유명 인사를 동일한 캔버스에 무수히 ‘인쇄’하는 독창적 작업을 통해 입증됐다. 이 두 소재는 모두 대중 인지도가 높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의 대중적 소재가 예술 대중화를 지향한다는 워홀에 대한 평가는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여장 사진엔 뒤샹에 대한 부채감이
그의 삶은 충분히 ‘비’대중적이었기에 그렇다. 외모 콤플렉스가 있던 워홀은 평생 유명 인사로 기억되길 꿈꿨고, 명망가와의 집착에 가까운 사교 생활로 이어졌다. 그가 80년 초에 진행했던 의 구성은 유명 인사와의 30분 분량의 인터뷰이니 오죽했을까. 워홀의 70, 80년대 작품 목록을 규정짓는 대표작은 그의 후원자와 유명 인사의 초상을 무차별적으로 찍어댄 연작들이다. 64년에 구입한 테이프 레코더로 자신의 삶을 수천 시간 분량의 테이프로 남긴 워홀은 그 무렵 자화상 제작에도 힘을 쏟는다. 이번 리움의 회고전 중 마지막 코너는 ‘보이지 않는 워홀’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생전 워홀의 모습과 자화상으로 편성돼 있다. 그중 여장을 한 워홀의 폴라로이드는 눈을 사로잡는다. 이미 오십 줄에 들어선 워홀은 돌출된 광대뼈, 숨길 수 없는 주름, 거기에 과장된 화장이 얹어지며 퇴물로 전락한 늙은 드랙퀸이 연상된다. 이를 통해 생전 워홀의 성정체성만을 엿본다면 곤란하다. 미술 전공자라면 여장한 워홀 스틸 컷이, 그의 미학적 선배에 대한 오마주가 읽혀야 옳다. 즉, 1921년부터 수년간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와 다다이스트 마르셀 뒤샹이 공조 제작한 여장한 뒤샹을 찍은 (Rose Selavy)가 연상돼야 정상이란 얘기다. 워홀과 동시대 팝아트는 흔히 1910년대에 활약한 뒤샹에 대해 미학적 부채감을 갖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오죽하면 팝아트의 선배 격인 재스퍼 존스를 ‘네오 다다’(새로운 다다)라 칭할까. 그러나 다다의 법통을 계승한 네오 다다나 팝아트는 기성 오브제를 소재와 주제로 흡수했다는 공통점을 제하면 다다이즘의 핵심인 반예술주의 철학을 수용하긴 고사하고 오히려 제도화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니 뒤샹에 대한 부채감을 느낄밖에. 더욱이 팝아트의 존립은 실험예술이 배척하고자 했던 상업 매체와의 유대를 통해서야 보장받았으니, 다다와는 닮은 꼴인 듯하면서 매우 다르다.
리움 회고전에서 처음 관객을 맞이하는 건 1962년 인데, 그가 딕 트레이시 만화를 회화에 도입한 해가 60년인 점, 그러나 62년 페루스 갤러리 개인전이 그의 팝아티스트 출정식으로 기억되는 점 등을 감안하면 꽤 귀한 물건들이 건너온 셈이다. 더욱이 워홀의 창작 문법으로 굳은 실크스크린 이전에, 보기 드물게 ‘손수 그린’ 62년작 을 코앞에 두고 보는 건 세월을 역류하는 기분마저 든다. 이 작품은 출간된 워홀의 도록들에서조차 쉽게 찾기 힘든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비록 다섯 범주로 이번 전시가 구획되고 있지만, 62년을 기점으로 그가 사망하기 한 해 전인 86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카피한 초대형 실크스크린 으로 매듭을 짓는 워홀의 작품 연대기가 계산된 기획전이다. 한편, 미학자 아서 단토가 ‘실제’와 ‘예술품’ 사이의 인식적 차이가 모호해진 현대미술의 난처해진 상황을 논거할 때 예시로 드는 등 이른바 ‘상자 조각’들이 64년 제작 당시의 상태를 양호하게 보존한 채 전시된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어떤 이는 이미지들의 반복으로 구성된 워홀의 캔버스를 모종의 언술도 거부한 모더니스트 회화의 기본 문법인 격자무늬(grid)의 변형이라고도 해석한다. 또 어떤 이는 워홀의 붓질에서 팝아트가 전복하려 했던 추상표현주의의 흔적을 읽어내려고도 한다.
그는 형식면에서 실크스크린의 대량 복제로 예술품 고유의 원본성을 훼손한 듯 보이나, 그 거대한 그림들을 가까이서 관찰하면 실크스크린이 올려진 바탕 위로 두툼한 안료가 마티에르의 재질감을 살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작가의 손길’을 서명처럼 남기고 있다는 얘기다. 내용면에서도 70, 80년대 서구 대중문화를 장악한 대중 스타의 초상이 워홀의 화면을 점령해 관객과 친밀감을 유지하는 듯하나, 이미 일반인과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이 선택된 자들의 무한 반복은 그 자체로 ‘비’대중적일 수밖에 없다. 전시를 소개하는 홍라희 관장의 인사말은 워홀의 성과를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이분법적 위계 구조를 와해함으로써 예술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요약하지만(이것이 워홀의 미학을 평가하는 보편적 태도다), 실제 현장에서 이런 진술을 체감한 정상적 관객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조금이라도 작품에 근접하면 여지없이 울려대는 경고음이 전시장 전체를 요란하게 채울 정도로, 20년 전에 세상을 뜬 어느 왜소한 체구의 사내에게 바쳐지는 대우는 극진하고 진중하니 말이다.
전시 기간에 워홀의 60년대 실험영화도 강당에서 별도로 상영된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65년 자신의 꽃그림 전시회를 통해 그는 미술계 은퇴와 영화 제작에 전념할 뜻을 밝혔으나, 이 말은 실현되지 못했고 계속 미술계의 명사로 남았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1966)이 상영 중인 극장 내부로 들어서자 확인된 관객은 필자밖에 없었다. 더블 스크린으로 자막도 없이 제시되는 204분짜리 영화는 견디기엔 너무 지루했을 것이다. 이건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 카메라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고정해 동일한 장면을 무려 8시간 분량으로 상영하는 (1966)같이 지루한 경지를 넘어선 영화도 적지 않으니. 이런 롱타임 실험영화는 관람이 아닌, 논쟁 유발을 목적으로 제작된다. 8시간을 누가 본다고. 비평가 루시 리퍼드는 워홀의 전대미문의 영화를 두고 “뛰어나기도, 혹은 무가치하기도 하다.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며 애매한 선을 그었는데, 이것은 워홀의 영화를 필두로 그의 논쟁적 복제 그림 전부에 함께 적용될 것이다. 워홀의 정신적 지주 격인 뒤샹의 실험도 그의 본래 취지와는 무관하거나 정반대의 효과를 초래하곤 했다. 요컨대 뒤샹의 등장으로 그의 난해한 작품을 풀이할 전문 비평가의 출현이 불가피했다. 이들이 대중의 의견을 형성했는데, 나름의 부작용도 적지 않다. 한 미술사가는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전문가의 견해라는 권위로 인해, 미술가의 의도는 언제나 그들 자신의 설명보다 더욱 복잡하고 심오하며 신비한 것으로 제시됐다.”
미술 관람객도 대량생산되는 듯
따스한 봄날, 상춘을 겸해 나들이 나온 인파로 리움은 입구 통로부터 전시 공간 전체가 그 어떤 기획전 때보다 북적였는데, 관계자에 따르면 평일 1500명, 휴일은 3천 명에 이른단다. 렘 쿨하스가 설계한 삼성아동교육센터의 외부 대형 통유리마다 워홀의 캠벨 수프 통조림 복제본이 그의 값비싼 원본을 대신해 관객의 호들갑스런 기념촬영을 보조해주고 있었다. 워홀은 40년 전 뉴욕에서 자신이 작업실로 삼은 거점을 ‘공장’(팩토리)이라 부르며 전성기를 구가했고, 덕분에 당대 현대미술의 완고한 문법은 재구성이 불가피해졌다. 그렇지만 74년 브로드웨이 860번지 3층에 작업실을 얻으면서(이것이 워홀의 세 번째 작업실 이전이다) 더는 팩토리가 아닌 그저 사무실(오피스)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팩토리는 오늘날 전설과 신화로 다듬어져 계승된다. 리움의 ‘앤디 워홀 팩토리’전에 무리지어 동선을 그리는 상춘객들을 지켜보며 미술 관람객이 대량생산되는 ‘관람 공장’ 같다는 인상을 받은 건 아마도 이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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