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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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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끝에 흩뿌려진 진달래 꽃잎이여

등록 2007-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유년시절 추억과 한국적 숨결을 진달래 꽃잎에 담은 화가 김정수씨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이라던 이해인 수녀의 시구를 떠올리며 진달래 화가 김정수씨의 작업실로 향했다. 봄으로 달려가는 마음 한구석을 진달래로 채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물론 도심 빌딩 숲 사이에 있는 작업실에서 진달래 꽃망울이 반겨줄 리는 없었다. 다만 붉은 봄꽃이 피어 있는 화폭에서 아련한 추억 한 자락이라도 붙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그의 캔버스에는 연분홍 웃음을 머금은 꽃망울을 찾을 수 없었다.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흩뿌려진 진달래 꽃잎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애써 감추는 듯했다.

을숙도 진달래빛 물감 찾아 세계로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수줍음이었을 뿐이다. 마치 자신을 맞이할 사람들을 애써 찾아다니는 듯하다.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떨어지거나 볏짚으로 만든 바구니에 쌓이며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대하는 식이다. 때로는 어딘가를 떠돌다가 돌다리 위에 수북이 쌓여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의 불빛 사이를 지나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꽃들도 있다. 하늘거리며 춤을 추기도 하고, 말없이 내려앉아 손을 내밀기도 한다. 이는 화가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림 앞에 선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깊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까닭이었을까. 김정수씨의 맑고 투명한 진달래 그림을 꽃망울을 흐드러지게 터뜨린 들길에서는 찾을 수 없다. 실제 군락에서 만나는 진달래꽃은 아련한 기억을 깨우기에 버겁다. 너무 진한 빛깔이 오래된 기억을 압도하거나 상상력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은 실재를 가공한 예술적 상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진달래의 색깔은 매순간 바뀝니다. 금세 생채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빨갛던 꽃잎일지라도 떨어질 때는 짙은 보라색으로 변하지요. 내가 꿈결처럼 붙들고 싶은 아련하게 예쁜 진달래 색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실제로 김정수씨는 특유의 진달래 색감을 찾는 데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때로는 진달래 꽃잎 색깔을 표현한 그림이 몇 년 뒤에 철쭉으로 바뀐 모습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는 진달래의 아스라한 느낌을 표현할 물감을 찾기 위해 세계 각국의 물감을 섭렵했다. 심지어 화집에서 발견한 색깔을 보고 러시아의 물감을 주문한 일도 있다. 그것도 유년시절에 낙동강 하구 을숙도에서 보았던 진달래의 느낌을 오롯이 살려내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달래여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윽한 깊이를 느끼게 하는 지금의 진달래 꽃잎은 오랜 발품의 결과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봄날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진달래. 김정수씨가 진달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문인화의 전통을 잇는 올곧은 선비의 자세에 가깝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서도의 엄격성과 명확성이 화폭마다 드러난다. 그의 작업실에는 버려진 캔버스가 수두룩하다. 유화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덧칠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획이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화선지를 구겼던 선비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절제된 색상과 표현을 생명력으로 삼았던 문인화를 그리는 마음이라 할 수 있죠. 완성된 작품의 3, 4배나 되는 실패작이 있어요. 한 번의 붓질이라도 잘못되면 세상에 내놓지 말아야죠.”

“한 번의 붓질이라도 잘못돼서야…”

이런 엄격성은 문인화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풀어가려는 다짐에서 비롯됐다. 김씨는 우리의 숨결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산천을 누볐다. 전남 완도의 보길도에서 설악산까지 진달래 길을 따라 스케치 여행을 수차례 했다. 그것으로도 오랜 타국 생활의 경험을 말끔히 씻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소나무와 진달래를 시시때때로 만날 수 있는 강원도 강릉의 사천항에 둥지를 틀고 농어촌을 두루 경험했다. 틈만 나면 강화도 외포리로 달려가 주민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농촌의 흙냄새가 피부 속으로 들어와야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작가의 믿음이었다.

“처음엔 진달래와 함께 소나무 그림도 그렸어요. 한 그루의 소나무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집에 들어갔는데 작업실에 세워진 소나무가 ‘일본식’으로 느껴졌어요. 전시를 앞두고 작업한 소나무 캔버스 60여 점을 모두 불태웠지요.” 이때 ‘마음만으로는 작업이 안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지금도 소나무 그림에는 미련이 많이 남아 있다. 언젠가는 다시 소나무 그림에 도전하려고 한다. 그때는 진달래에 얽혀 떠오르는 유년기의 영상이 있듯이, 소나무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정서적인 교감을 이뤄낸 뒤이리라.

사실 김정수씨의 진달래 그림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작가의 정체성을 모색한 결실이다. 그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산수화’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입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1980년대 초반 정치적 폭압의 시기에 사과에 검은 페인트칠을 하거나 깨진 소주병 조각을 합판에 붙이고, 산나무에 화학재료를 뿌리는 방식 등으로 ‘인식의 윤리’ 시리즈 작업을 했다. 관객과의 소통을 꾀하면서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에 대해 발언을 한 셈이다. 젊은 작가들과 함께 ‘서울·다큐멘트’전을 마련하는 등 한국 미술의 ‘전위’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1년 예술적 원기를 회복하려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입체 작업의 ‘업그레이드’를 꾀한 파리행이었다. 그런데 입체로는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우연히 만난 고 백남준씨도 ‘미디어 아트’ 같은 고난의 길을 가지 말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평면 추상 작업으로 파리 생제르맹데프레의 센가 화랑을 누볐다. 자연과 문명의 공존을 표현하고, 한국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강한 작품들이었다. 문제는 그만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어느 순간 강한 것이 전부는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의 흐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내 마음에 가장 편한 것을 찾게 되었죠.”

꽃잎만으로도 한국적 정서 담아내리

이제 김씨는 그림으로 정체성에 접근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진달래 꽃잎만으로도 한국적인 정서를 모자람 없이 담아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자연에서 찾을 수 없는 우연한 표정을 그려낼 상상력에 갈증을 느낄 뿐이다. 캔버스 뒷면의 코팅된 마대에 그린 그의 진달래 그림이 4월3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 전시된다. 그는 진달래 꽃잎 앞에 서는 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최소한의 화두를 건넬 뿐이죠. 관람객이 상상력을 통해서 답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작품 앞에서 서 있는 시간만큼의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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