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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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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지 않은 이 놈의 세상아

등록 2007-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가족은 외면하고, 조직도 배척한 중년의 조폭을 그린 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저 아저씨의 매력은 뭘까….’

언제나 스크린의 송강호를 보면서 생각했다. 최근에 의 강두를 연기하는 송강호를 볼 때도, 저 역할에 잘 맞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뭘,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더듬거리며 에서 “배배배, 배신이야!” 하는 송강호를 보면서 웃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그렇게 웃기는 송강호는 좋아했지만, 웃기지 않는 송강호가 그렇게 실감나는 인물로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를 보면서 송강호라는 아저씨의 매력을 비로소 ‘느꼈다’. 송강호가 연기하는 중년의 조폭 강인구를 보면서, 비로소 저 아저씨한테 정이 간다고 느꼈다. 그것은 의 탁월한 점인데, 또한 그것은 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요소다.

집에서 ‘쪼이고’ 밖에서 ‘몰리고’

의 제목은 역설이다. 조폭조직 들개파의 중간 보스인 인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혀 ‘우아한 세계’가 아니다. 그의 직업생활도, 가정생활도 우아하지 못하다. 조폭계는 멋있는 액션이 이어지고 끈끈한 의리로 묶여진 우아한 세계가 아니고, ‘스위트 홈’을 꿈꾸지만 가족은 그를 부끄러워한다. 중학생 딸 희순(김소은)은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일기장에 쓰고, 부인 미령(박지영)은 그가 ‘직장’을 때려치우지 않으면 차라리 이혼하겠다고 말한다. 그의 직업이 조폭인 탓이다. 그의 직장은 노씨 형제가 회장님, 상무님, “다 해먹는” 회사다. 조직의 보스인 노 회장(최일화)은 인구를 동생처럼 여기지만, 진짜 동생인 노 상무(윤제문)와 동생 같은 인구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어쩔 수 없이 핏줄에 끌리는 인간이다. 게다가 노 상무는 조직의 라이벌인 인구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과일만 4년째” 하면서 청과물 도매업으로 식구들 입에 풀칠해온 인구가 간신히 아파트 사업권을 따내자, 노 상무는 이권을 뺏으려 안달이다. 이렇게 가련한 인구는 집에서 ‘쪼이고’ 밖에서 ‘몰리는’ 이중고에 처해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성실한 조폭 가장은 아파트 사업을 따내어 챙긴 돈으로 교외의 그림 같은 집에서 우아하게 사는 ‘스위트 홈’을 꿈꾼다.

그렇다고 한재림 감독의 가 그 남자의 사정을 동정하지 않는다. 한재림 감독의 데뷔작인 이 연애의 신랄한 현실을 보여줘 연애에 대한 환상을 깨는 목적을 담았듯, 는 인구의 비루한 일상을 통해 조폭 세계가 우아한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를 에 이은 ‘생활의 목적’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인구의 생활은 땀에 젖은 ‘난닝구’처럼 후줄근하다. 아파트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서 업자의 손에 억지로 인주를 묻혀서 가까스로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는 악다구니의 세계다. 어렵게 사업권을 따내지만 이번에는 건설현장에서 인부들이 저항하고, 그들을 제대로 제압하지도 못한다. 심지어 부인에게 “이제는 쌈질도 못하지?”라는 말을 들을 만큼 인구는 늙었고, 작업은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인구의 악전고투를 비추는 카메라는 때때로 흔들린다. 에서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가끔씩 흔들렸던 카메라는 에서도 여전하다. 날것의 대사도 여전해서 징글맞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날것의 대사와 흔들리는 화면은 가끔은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신랄한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찌질한’ 조폭에게 연민은 이제 그만

는 비장한 조폭 영화도 아니고, 웃기는 조폭 코미디도 아니다. 오히려 조폭 영화의 비장함과 조폭 코미디의 웃음의 대척 지점에서, 신랄한 현실로서 조폭 세계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분명한 영화다. 나아가 조폭이라는 조금은 극단적 ‘직업’ 설정으로 중년 남성의 밥벌이를 얘기하는 영화다. 언제 칼 맞을지 몰라서 전전긍긍한다는 인구의 일상은 언제 잘릴지 몰라 노심초사하는 직장인의 불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재림 감독은 “직장인의 삶과 조폭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의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송강호도 “인구의 역할이 대한민국 남성을 대표하는 보통의 가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했다”고 밝혔다. 과연 그렇게 의 세계가 조폭의 세계를 넘어서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됐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인구의 악전고투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 영화가 ‘찌질한’ 조폭 남성에 대해 줄기차게 보였던 연민과는 다르다. 하지만 의 차가운 연민도 결국은 연민이 아닌가, 중년의 가장에게 보내는 연민이 또다시 보태질 이유가 있는가, 고민은 남는다. 한편으로 는 손에 피 묻히는 가장을 부끄러워하지만, 피 묻은 돈은 끝내 마다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이중성도 외면하지 않는다. 인구의 부인은 “깡패 짓해서 벌어온 돈 한 번도 맘 편하게 써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벌어온 돈으로 일상을 꾸린다. 아이들을 캐나다에 유학 보내고 자신도 뒷바라지를 핑계 삼아 떠난다. 결국 인구는 기러기 아빠로 남는데, 는 해체되지 않고도 해체되는 가정에 대한 질문도 담고 있다.

한재림의 세계에 송강호는 맞춤하게 어울린다. 송강호는 자동차에서 조는 어리숙한 중년의 모습으로 새롭지 않게 등장한다. 하지만 화면이 바뀌다 보면 어느새 새롭게 다가와 살갑게 느껴진다.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조직에서 배척당하면서도 끝까지 무언가를 지키려는 중년의 인구를 보면서 당신의 아버지, 당신의 형님(혹은 오빠)에게서 어떤 순간에 느꼈던 측은지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정말 안됐다’보다는 ‘(그냥) 안됐다’는 심정에 가까운데, ‘정말’을 붙일 만큼 머나먼 감정이 아니라 ‘정말’을 떼어낼 만큼 일상적인 느낌이라는 뜻이다. 송강호와 오달수는 마주 앉는 그림만으로 느낌이 살아난다. 오달수는 인구의 라이벌 조직인 자갈치파의 중간 보스 현수를 연기하는데, 오달수와 송강호가 마주 앉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전개되고, 캐릭터가 약속되고,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그들이 마주 서면 영화의 무거운 공기에 숨구멍이 뚫리고 활기가 생긴다. 중년의 두 남자가 밥을 먹다가 물장난을 주고받는데, 그들의 연기가 천진난만해도 느끼하지는 않다.

사설이 길지만 지겹지는 않아

한재림의 영화는 꼬리가 길다. 이제는 끝났다 싶어도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혹은 새롭게 시작한다. 이렇게 그의 영화는 사설이 길지만 지겹지는 않다. 에서도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이어지던 연애가 마침내 파국으로 끝났다고 여겨질 무렵에 또 다른 후일담이 이어졌듯이, 에서도 인구의 악전고투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고 생각할 무렵에 또 다른 마지막이 이어진다. 4월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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