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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스파이, 그 야비함을 들키다

등록 2007-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에 이어 내놓은 폴 버호벤 감독

▣ 김봉석 영화평론가

은 폴 버호벤이 할리우드를 떠나,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가 만든 스파이 영화다. 2차 대전 말기, 독일군이 점령한 네덜란드에서는 유대인 박해가 자행된다. 외국으로 도망치려던 레이첼은 독일군의 습격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만 겨우 살아남는다. 레이첼은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레지스탕스에 합류하고, 우연히 기차에서 만난 문츠 대위에게 접근해 독일군 사령부에 취직하게 된다. 보통의 스파이 영화라면, 이후의 이야기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정보를 빼내고, 누군가에게 의심을 받아 체포되기도 하는 등등.

하지만 폴 버호벤이 누구인가. 등 갖가지 논쟁과 구설수를 초래하는 영화를 도맡아 만들어온 폴 버호벤이 단지 스릴 넘치는 스파이 이야기에 혹했을 리 없다. 실화에 기초했다는 은 시작부터가 기괴하다. 유대인을 비난하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숨어 있던 레이첼은 아침마다 신약성서를 외워야만 밥을 먹을 수 있다. 레지스탕스 내에서는 항상 유대인보다 네덜란드인이 우선이다. 독일군 내에도 평화를 원하는 지적인 군인이 있는가 하면, 레지스탕스 내에도 정보를 팔아넘겨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야비하고 잔인한 악당도 있다. 독일군에게 가족을 잃고 스파이 활동을 한 레이첼은, 전쟁이 끝나자 다시 독일군에 협력한 민족반역자로 몰려 수난을 당한다. 의 스토리는 반전을 거듭하지만, 결코 장르적인 쾌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당혹감과 안타까움으로 일관한다.

양심적인 독일군, 사악한 레지스탕스?

애초에 폴 버호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스파이가 된 유대인 여성의 활약상이 아니다. 폴 버호벤은 자신의 영화에서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왔다. 천박하고 비열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폭력성에 대해서. 을 보고 있으면, 집단이라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유대교와 기독교, 레지스탕스와 독일군과 연합군 등 서로 다른 이상과 가치관을 지닌 집단들이지만 그들의 내면은 동일하다. 독일군이 양심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레지스탕스가 사악할 수도 있다. 레이첼은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지옥 같은 고통을 겪은 뒤 이스라엘로 가지만, 그곳도 낙원은 아니다. 마지막 장면, 과거를 회상하며 몸서리쳤던 레이첼에게 가족이 돌아온다. 저녁이 되어 온 가족이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서 카메라가 빠지면, 레이첼의 가족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키부츠 농장 안으로 황급히 들어가고 군인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아무리 권력의 주체가 바뀌어도, 세계의 폭력은 계속되는 것이다. 신랄하고 적나라한 은 정말 폴 버호벤다운 영화다.

1938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폴 버호벤은 폭력과 섹스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1973)으로 명성을 얻은 뒤 으로 네덜란드 최고의 감독으로 인기를 끌었다. 폴 버호벤은 어떤 금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성을 아름답게 포장하려 하지 않았고, 폭력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거나 영웅적인 폭력을 미화하지도 않았다. 폴 버호벤은 섹스와 폭력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실생활에서 보고 느끼는 그대로, 추잡하면서도 신성하게 그려냈다. 폴 버호벤이야말로 진정한 사실주의 감독이었던 것이다. 할리우드가 폴 버호벤을 끌어들인 것은, 현실의 성과 폭력을 있는 그대로, 묵중한 사실감으로 그려내는 재능이었다.

제대로 천박하게 번들거린

폴 버호벤은 아주 영리하게 할리우드에 안착했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1987)과 (1990)은 탁월한 블록버스터였다. 지극히 폭력적이면서도 할리우드적인 스펙터클에 폴 버호벤의 주제의식이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섹스’ 역시 사이보그가 된 인간, 정체성을 잃거나 기형이 된 인간의 이면에 악몽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자신이 천착하는 주제를 전혀 버리지 않고도, 폴 버호벤은 할리우드가 원하는 블록버스터를 매끈하게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1992)은 블록버스터의 이야기 구조에, 폴 버호벤의 주제의식을 완벽하게 결합시킨 걸작이었다. 에는 사마귀처럼 남성을 ‘잡아먹는’ 여자가 나온다.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남자를, 섹스로 지배하는 여자의 파노라마다. 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간신히 허용할 수 있는 극한까지 모든 것을 밀어붙인다. 을 보는 관객은, 자신의 ‘본능’에 대해 의심하고 또 물어보게 된다. 자신의 진짜 얼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에서 아슬아슬하게 극한까지 달려갔던 폴 버호벤은, 이후 느긋하게 ‘문제작’들을 만든다. 라스베이거스가 무대인 은 지독한 혹평을 받았고, 최악의 영화에 상을 주는 골든 라즈베리상에서 작품, 감독, 주연여우상 등을 독식했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폴 버호벤은 태연하게 골든 라즈베리상 시상식에 찾아가 웃는 얼굴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골든 라즈베리상은 할리우드의 ‘졸작’을 비웃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영화제일 뿐이다. 은 정말 천박하고, 정말 번들거리는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라스베이거스 쇼 비즈니스의 세계다. 폴 버호벤은 할리우드 뮤지컬의 판타지를 원하지 않는다. 가장 천박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폴 버호벤의 전략이었다. 그 결과, 지금 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컬트 영화의 하나가 되었다.

‘인간의 가장 솔직한 얼굴’을 추구해

(1997)는 군국주의, 잔혹한 전쟁을 컴퓨터 게임처럼 묘사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건 맞는 말이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우리 세상의 일면이라는 폴 버호벤의 의도다. (2000)을 보자. 투명인간은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이지만, 폴 버호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투명인간에게 접근한다. 폴 버호벤은 ‘악의’를 이야기한다. 투명인간을 만들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천재는, 재능을 낭비한다. 여자를 희롱하고, 사소한 이익이나 감정에 흔들리며 악행을 일삼는다.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설정처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유치한 본능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가장 기본적인 본능. 그것을 부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가면을 뒤집어쓴 순간부터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상식과 도덕, 질서 같은 것들이 오히려 인간을 기만하기 시작한 것이다. 폴 버호벤은 우리의 기만과 가식을 경쾌하게, 그러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발하지 않고 그냥 우리 눈앞에 있는 그대로 전시한다.

할리우드를 떠난 폴 버호벤은 한때 십자군에 대한 영화를 기획했다. 폴 버호벤은 영화를 만들기 전 네덜란드의 TV에서 중세를 무대로 한 를 제작했고, 85년에는 제목부터가 인상적인 를 만들었다. 신의 시대였지만, 인간의 본능이 극한까지 치달았던 중세는, 폴 버호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시대다. 최근에는 교회에 의해 지워진 ‘인간’으로서 예수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인 것이다. 가장 고결한 인간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는 무엇이었을까? 폴 버호벤이 추구해온 것은, 우리의 가장 솔직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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