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 거리에 마주선 구상 조각가 마리니와 청년작가 천성명의 조각전…‘전혀 상이한 문법’의 조각들이 유발하는 혼돈은 피곤하지만 즐거운 경험
▣ 반이정 미술평론가
엉뚱하지만 지난해 3월 로댕갤러리 전시 오프닝의 한 광경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보자. 로댕갤러리의 로비는 통유리로 전면을 둘러친 ‘글래스 파빌리온’이다. 이 공간은 갤러리의 이름을 따온 세기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두 점, 즉 12번째 에디션과 7번째 에디션을 상설 전시할 목적으로 설계했다는 게 로댕갤러리 쪽 설명이다. 그렇지만 글래스 파빌리온의 남아도는 공간을 방치하기가 허전했던지 로댕갤러리의 모든 기획전의 출품작 일부는 반드시 글래스 파빌리온에 19세기 거장과 함께 전시되곤 했다.
지난해 3월에는 고 박이소씨의 유작전이 마련됐는데, 당시 출품된 는 합판과 공사장용 조명 장치를 결합시킨 참으로 ‘박이소스러운’ 썰렁한 입체 조형물로서, 글래스 파빌리온에서 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이를테면 동일한 시공간 속에 각기 19세기 유럽과 21세기 동아시아의 ‘꽤나 앞서 간’ 미적 실험들이 충돌한 사건이다.
덕수궁엔 고전, 경복궁엔 신경향이
거창한 비유를 들었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조각이라고 알려진 장르를 대하는 두 세기의 시차를 둔 태도가 한 공간에서 비교되는 광경인 점은 틀림없다. 육중한 청동 주조가 빗어낸 근대 초의 리얼리즘(로댕)과 싸구려 기성 합판의 조합으로 제기된 탈근대의 냉소주의(박이소)는 어쨌거나 조각이라는 알량한 공통분모로 엮이는데(물론 동시대 미술에서 조각은 입체 조형물 또는 설치라는 포괄적인 이름을 빌려, 장르 구분의 모호함을 비껴가려 하지만) 둘 사이의 유형적 차이가 너무 큰지라 조각으로 묶이는 게 납득이 가는 건 아닐 게다.
비슷한 연장선에서 현재 전시 중인 두 조각전 얘기를 이어갈까 한다. 근대미술 전문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덕수궁에 있는, 덕수궁 미술관은 고즈넉한 근대 초기 실내의 널찍한 복층 전시실에 전후를 대표하는 구상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관람객을 만나고 있다. 그곳에서 걸어서 약 20분 거리의 경복궁 동문 맞은편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에서는 국내 청년작가 천성명씨가 네 개 층의 촘촘한 전시실에서 최신 조각 경향을 유감없이 반영한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20세기 중반 전성기를 누린 마리니는 현대를 살았지만 조각사에서는 다분히 고전주의에 경도된 구상 조각가로 기록된다. 미술사의 거장 전집류의 화첩을 유심히 들여다본 이라면 마리니란 고유명사는 항시 늘씬한 청동 기마상과 연동되어 떠오를 것이다. 그렇지만 무려 102점을 공수한 이번 마리니 초대전은 기대와는 달리 그를 대표한 기마상이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이번 전시의 구성은 크게 기마상, 포모나(변형된 나체 여성상으로 이해하면 됨), 초상 조각, 그리고 밑그림들로 채워졌다. 말과 기수가 한 짝을 이룬 기마상의 전통은 제정 로마의 에서 정점에 이르는데, 정작 이들 작품의 주제는 제목처럼 기수와 말 사이의 혼연일체이기보다 말 위에 올라탄 이의 위용 과시에 치중한 정치적 조형물의 성격이 짙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고전주의에 매료되었노라 고백해온 마리니의 기마상은 에트루리아 미술의 양식을 따른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인 듯하다. 그래서 다분히 아르카이크(고풍스런)하고 경직되고 정적인 곡선이 그의 모든 조형물을 마감하고 있다. 기마상을 취하되 역동성은 견제되고, 영웅주의에 복무한 기존 기마 도상의 전통에 의존하지 않는다. 마찬가지 논리로 1940년대 초반에 제작된 는 풍만한 토르소의 나체 여성 입상의 몸통에서 머리를 통째로 날려버린 채(!) 제시하고 있다.
흠집으로 미학적 생존을 꾀한 마리니
이처럼 고전주의를 지향하지만 미의 완결성에 고의로 흠집을 내는 태도는 무엇일까. 요컨대 슬쩍슬쩍 미적 표준에서 벗어난 마리니의 행보에 대해 전시 도록 해설 글은,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절망과 실존적 무력감이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풀어주고 있다. 하지만 굳이 이걸 모범 답안으로 받아들일 까닭은 없다고 본다. 설령 그런 해설이 작가의 입에서 나온 고백에 근거했다 할지라도. 언술이 수용되기 힘든 조형물에 시대 상황을 참작해서 감상하는 방법은 유구한 관행이긴 하다. 그러나 말없는 대상에 적용된 시대성이란 달리 말해서 입증할 방법도 반증할 방법도 없는 게 사실 아닌가.
그렇지만 마리니의 공적을 그가 1940년을 기준으로 팽창했던 엄격한 모더니즘의 문법에도, 그 이전 고전주의적 문법에도 크게 경도되지 않고 자신의 미학적 생존을 도모한 것으로 풀이한다면 크게 왜곡된 해석은 아니리라. 본디 예술에서 나타난 실험 정신이란 공인된 전통 중 일부의 수용과 일부의 포기를 통해 예술사의 바통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마리니가 여전히 건재했던 1961년은 현대미술사에서 하나의 사건과 만나는 해다. 학계에서조차 미술사는 곧 회화사와 통할 만큼 조형 예술사는 회화로 환원되곤 한다. 평면 회화 우세다.
그런 점에서 1960년대 직후 미술사는 조각의 일시적 반등이 관찰된 해로 기억돼야 하지 않을까. 그 무렵 미국과 전세계적 미술계에 맹위를 떨친 미니멀리즘이 탄생했으니. 작가적 감성 표출을 자제하고 엄격하고 형식적인 미학적 태도를 견지한 미니멀리즘의 정점은 로버트 모리스가 무대 위에서 7분의 시간 동안 8피트 높이의 회색 기둥을 세워둔 뒤 3분30초가 지나자, 그걸 쓰러뜨려 남은 3분30초 동안 방치한 다소 허전한 퍼포먼스에서 찾을 수 있다.
형식주의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는 이런 요소를 연극성이라 칭했고, 연극성의 개입으로 미술의 순도가 훼손된다며 평가절하했다. 이런 순정주의를 고수한 모더니즘의 미학적 도그마는 한동안 국제 표준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창작 현장에서 쏟아지는 다양성의 파도를 막아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화단에서 조각가가 퍼포먼스를 행하거나 동적인 요소를 조각에 도입하는 것은 화제로 쳐주지도 않는다.
엽기적 인물 설정에 미장센 활용
2000년 중반에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천성명은 한 시절 몰취향의 오명을 뒤집어썼던 연극성을 극대화해 작가적 입지를 각인시킨 예다. 등신보다 작거나 혹은 월등하게 큰 사이즈로 제작된 천성명의 잿빛 인형은 그 자체로 개별 조각품의 지위를 누릴 테지만, 소기의 성과는 오로지 연극성의 개입을 통해서만 달성된다. 작품이 놓인 방은 모노드라마가 연출되는 소극장 한구석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염두에 뒀으리라. 그저 네모 반듯한 상자에 불과했던 1960년대 미니멀리즘의 ‘관념적 연극성’과는 차원이 이미 다른 장르상의 연극성이 짙게 배어 있다. 배당된 텅 빈 공간, 조명 세팅 그리고 등장인물의 위치. 이같은 연출력은 연극의 용어일 테지만,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하는 기법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은 미술계에서 소비되고 생산되는 미술품이다. 천성명이 천착한 연극성은 편차가 있어서 그렇지, 국제 무대는 물론 국내 화단에서도 기왕에 시도된 바 있어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천성명의 상징성은 연극성을 성토하던 시대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진 ‘장르 혼재의 시대’를 사는지와, 고전 조각(마리니)과 그에 상반되는 조각들이 혼재된 조형 현실을 관조할 때 한 예증으로 제시될 때 빛난다.
잭 번햄은 저서 에서 조각의 근본 목표를 생명의 복제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만큼 리얼리즘에 대한 희구가 입체를 취급하는 예술가에게 강렬하다는 뜻일 게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수백 개의 손처럼 살았던 손… 이 손을 지배한 이가 궁금하다”는 의미심장한 은유로 로댕의 하이퍼리얼리즘을 상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로댕의 리얼리즘은 당대의 승인받은 미적 기준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의 경우, 깨진 코로 대칭이 어긋난 얼굴 형상은 살롱전에서 거부되는 빌미가 되었다. 로댕의 리얼리즘은 당대적 미학 기준을 극복했기에 유의미한 것이다. 한편, 천성명의 리얼리티는 고전 조각에서는 찾기 힘든 피떡이 된 엽기적 인물 설정과 무대 연출이 동원되면서 장르 간 완고한 경계가 와해된 조각의 현실(리얼리티)을 재현한다.
마리니와 천성명의 조각은, 앞서 인용한 한자리에 동석한 로댕과 박이소만큼 어색하고 상이하다. 그 둘의 연결고리를 찾는 건 덕수궁에서 경복궁까지의 도보가 동반하는 피로만큼 힘겨우나 나름대로 즐길 만하다. 요지는 이렇다. 우리가 현대 미술에서 느끼는 혼미함은 동시대 전시장에서 나란히 병렬된 ‘전혀 상이한 문법의’ 조각들이 유발하는 장르적 혼돈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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