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훈 기자
이제는 우리의 세상이야. 전자와 스위치의 세상이지. 키보드의 미학. 우리는 국적도 없고 피부색이나 종교도 없어. 그래 우리는 범죄자야. 맞아. 나는 범죄자야. 그리고 나의 죄목은. 호기심이야. -(1995) 중에서

스팸 여왕 김하나가 잡혔다. 수억 통의 스팸메일로 수천만 이메일 이용자의 계정을 초토화시켜온 바로 그 김하나다. 이름도 아리따운 스팸 여왕에게 은근한 사이버 페티시를 느꼈을 분에게는 좀 원통한 일이지만, 김하나는 탱글탱글한 스물한 살 남자 대학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세대를 불문하고 강력하게 어필했던 이름의 출처도 싱겁기 그지없다.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姓)인 ‘김’에다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스팸 프로그램이라는 의미의 ‘하나’를 갖다붙인 이름이었단다. 그러나 무한의 주인인 사이버 세상의 스팸녀들은 여왕의 숙청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늘도 이메일을 열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그녀들의 러브레터들. ‘남자에게 굿!’을 외치는 비아그라 자매 강미주와 강미란도 있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환영’이라며 언제나처럼 생긋 웃어주는 영란 언니도 있고, ‘고개 숙인 남성이여 새롭게 일어나라!’며 피곤한 아침 출근길에 활력을 안겨주는 진현씨도 있다. 이름이 제일 이쁜 양연지씨가 ‘중년 남성만을 위해’라며 고개를 홱 돌릴 때면 마음이 다 아프다. 다만 ‘회사원 당일 100%!’를 외치는 대출 여왕 박영자 언니. 먼 친척 이모가 보내는 메일 같아 좋긴 합니다만 좀더 젊은 성함으로 바꾸시는 것도 고려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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