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전 아래층에서 마주친 자유구상 작가 로베르 콩바스전…말풍선 넣은 ·록그룹 그린 이 감각을 깨우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인간의 잠재의식을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려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실제 세계를 포착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흔히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작가로 불리는 그의 그림 앞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이식받으려는 사람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상상력과 판타지를 적절히 버무려 자기만의 몽상적 영역을 구축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거장의 작품에 대한 어설픈 짝사랑을 절감하며 미술관 계단을 내려오면 예상치 않았던 감흥이 기다린다. 여기에선 전복적 가치에 짓눌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깨어나며 시대에 대한 통찰이 혈관을 파고든다.
서울시립미술관이 마련한 프랑스 자유구상 회화의 대표작가 로베르 콩바스전 ‘Savoir-Faire’(임기응변의 재치를 뜻함)는 마그리트의 거대한 날개 아래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새의 애처로운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프랑스 미술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의 미공개작과 신작 52점을 국내 최초로 선보인다는 말도 관객을 어떤 이와도 구별되는 콩바스의 작품 앞에 세우지 못한다. 이른바 프랑스의 앤디 워홀로 불리면서도 세속적인 성공을 꿈꾸지 않으며 ‘숨어 있기 좋은 방’을 떠나지 않은 때문이리라. 하지만 누구라도 콩바스의 방을 엿보는 순간 또 다른 거장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
만화와 록에 빠진 자유로운 영혼
도대체 로베르 콩바스의 자유구상 회화란 무엇일까. 만화와 록에 빠져 청소년 시절을 보낸 콩바스는 전통적이고 안정적인 기존의 회화 방식을 거슬렀다. 1970년대 주류 작가들이 지성적이고 국제화된 양식의 모더니즘 회화 경향을 보일 때 ‘현실’에 뿌리를 둔 구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이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펑크적인 시대를 통과한 작가의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장 프랑수아 모치코나치는 콩바스의 작품에 대해 “도시에 모여 사는 이들의 인식을 사회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라고 말했다. “소비산업 사회의 집단적인 자기 상실을 상징하는 패러디식 키치, 변질된 아방가르드를 융합해낸다.”
실제로 콩바스는 원초적인 본능과 문화에 대한 의지를 원초성에 기대어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는 아방가르드 작품과 언더그라운드 문화, 고딕의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전통문화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내재돼 있다. 특정 양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즉흥성을 추구한 때문이다. 절묘한 ‘뒤섞임’을 통해 드러난 순수와 개성은 추상적으로 읽힌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화면에서 환상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강렬한 색채와 유쾌한 망상이 빚어내는 자유로운 소통 의지가 담겨 있다. 예컨대 (2003)를 그리면서 다양한 혼합 과일 위에 놓인 바나나, 생선을 곁들여 스파이를 불러내는 식이다.
이런 자유구상은 낯선 미술 양식이 아니다. 기존의 형상이나 방법을 차용해 회화에 생기를 부여하는 방식에 가깝다. 다만 콩바스가 그렇듯이 회화는 물론 조각, 공예 등의 양식이 서로 통합되어 구분이 모호해지는 양상이 나타난다. 즉, 회화에서는 오브제가 첨가되거나 화면 자체에 입체적 성격이 부여되고, 조각에서는 색채를 사용해 표면 효과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양식은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논리나 시각보다는 감성과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프랑스의 자유구상과 함께 미국의 뉴페인팅, 독일의 신표현주의, 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사실 콩바스의 작품 앞에서 자유구상이라는 용어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저 익숙한 이미지를 본다는 생각으로 그림 앞에 서면 된다. 만화나 광고, 명화 등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 앞에 서면 콩바스가 말을 건다. 초기 작품인 (Bateau, 1977)에는 ‘어제 저녁에 외출을 했다. 눈이 왔다. 길 모퉁이에서 미키를 만났다. 미키는 손을 들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배.”’라는 글이 말풍선처럼 쓰여 있다. (1979)에서는 아랍의 글씨를 닮은 문양을 두고 이주민들의 빈곤 문제를 살짝 드러낸다. 낯선 도시에서 에고의 시기를 견디며 다른 문화에 연대의 손을 내미는 셈이다.
강렬한 색감 속에 날뛰는 의미
그러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콩바스는 특유의 스타일을 확립한다. 검은색 줄로 감싼 캔버스에 강렬한 원색의 색채를 사용하면서 자크 드 루스탈의 ‘그림만화’ 떠올리게 하는 그림을 선보인다. 어린 시절 공책에 싸움 그림을 끼적끼적한 기억은 섬뜩한 총성에서도 웃음을 머금게 하는 그림으로 이어진다. (1987)은 폭력적인 광기에서 인간을 생각하도록 한다. 기관총을 난사하는 군인 뒤에 한 비폭력적인 인물이 ‘사랑과 전쟁 그리고 행복’이라는 글씨를 새긴 플래카드를 들고 나 홀로 시위를 하는 풍경이다. 만화적 위트가 원초적 색감을 정화하는 듯하다.
이처럼 콩바스는 야수파보다도 강렬한 색감 사이에 미친 듯이 날뛰는 의미를 불어넣는다. 예술의 전 역사를 섭렵하면서 트로이전쟁에서 톨루즈 로트레크와 빈센트 반 고흐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소화한다. 콩바스는 청소년기에 심취했던 팝음악의 영향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폭발할 듯한 아방가르드 음악의 전설적 록그룹인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같은 제목의 화폭에 담아내고, 월드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한 록그룹 ‘밴드 오브 더 통’을 공연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그린 (2005)을 선보이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면서 발언을 하려는 열정을 록에서 찾는 것이리라.
“만화를 그리는 것처럼 선을 그리는 게 그림을 그리는 가장 자연스런 방법”이라 여긴 콩바스는 “내 그림, 그것은 진짜 록이다. 감정의 탐색, 감정 그것은 믿음이고 정글에서 미친 전투이고 춤”이라고 했다. 이런 생각은 미술에 관심 없는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콩바스의 몸부림에서 나왔을 것이다. 만화와 미술의 접목을 시도하는 만화평론가 박창석씨는 “콩바스가 엮어내는 기발한 만화적 상상력은 세상에 대한 발언을 위한 도구에 가깝다. 원초적 감성을 드러내면서도 여성과 전쟁, 이주자 등에 대한 현실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도 그를 거치면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한다.
700원으로 맛보는 색다른 미술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던 콩바스는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라는 작품을 출품하면서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여전히 마약 복용의 후유증으로 손떨림이라는 고통을 겪지만 굵은 테두리 안과 밖을 넘나들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특유의 독창성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너른 세계로 나아가는 콩바스의 면모는 연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원시적 색채 사이로 부드럽게 말을 거는 콩바스. 서울시립미술관 1층에 가면 700원으로 우리가 몰랐던 미술의 색다른 재미를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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