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불편한 세상에 디자인을 건네다

등록 2006-12-28 00:00 수정 2020-05-03 04:24

모든사람을 위해 상상력 발휘한 ‘제1회 유니버설 디자인 공모전’…응급시에 색 바뀌는 벽, 벨소리에 진동하는 카펫 등 아이디어 봇물

▣글·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전북 익산 남성여고 3학년 김예솔양은 서울대 수시 전형에서 미술대학 디자인학부에 합격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지체장애 1급으로 일반 수시 전형에 응시한 때문이었다. 김양은 “평균 키에 맞춰 설계된 장롱이나 문고리 위치 때문에 힘들어하는 키 작은 친구들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제품의 각도나 위치를 조금 바꾸면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김양은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을 공부하기로 했다. 모든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디자인하고 싶은 것이다.

비단 김양만 유니버설 디자이너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이 마련한 ‘제1회 유니버설 디자인 공모전’에는 전국 50여 개 대학에서 350여 작품이 응모됐다. 이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이 서울 인사동 덕원갤러리에서 지난 12월26일까지 전시됐다. 여기에는 청각장애인의 주거 특성을 고려한 실내건축 디자인, 장애물이 없는 도시환경, 복용 시간을 알려주는 의약구급함 등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 수두룩했다. 비록 완성된 제품으로 만날 수 없는 게 안타까웠지만 인간의 삶 자체를 조형화하는 디자인의 진화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보이는 소리, 촉감있는 이미지의 세계

이번 공모전에서 ‘청각 장애인을 위한 시지각 주거공간’으로 대상을 차지한 상명대 실내디자인학과 백민경씨는 “장애인을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에서 청각 장애인을 배려하는 흔적이 별로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청각 장애인들이 재해나 화재 등 위급한 상황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실내공간을 꾸몄어요. 소리 없이도 소통이 될 수 있는 기술을 적용한 것이지요.” 그야말로 ‘청각의 시각화’를 시도한 셈이다. 학과 선배인 이진선씨와 함께 꾸민 화장실은 중간에 물이 있는 유리벽으로 이뤄졌다. 이 유리벽은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경보기를 누르면 물이 진동을 일으키면서 색깔이 바뀐다.

청각 장애인의 주거공간에서는 촉각도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인다. 예컨대 방문객이 초인종을 누르면 거실이나 주방 등의 바닥에 깔린 카펫이 진동한다. 센서에서 신호가 나와 카펫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연과의 교감도 이끌어낼 수 있다. 바람과 비 등 자연의 소리를 파동의 크기에 따라 색깔로 표시하는 장치를 이용하면 된다. 주거공간에 시적 감수성을 가미해 지연을 느끼고 일상의 파편을 잡아내는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한국재활복지대 박광재 교수(인테리어디자인)는 “청각 장애인의 주거공간에 필요한 기능적인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면서도 디자인 측면에서 창의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사실 유니버설 디자인은 특정인을 위한 개념이 아니다. 애당초 유니버설 디자인은 장애인이나 고령자 등의 일상생활을 도우려는 디자인으로 시작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에서 비롯됐다. 배리어 프리가 특정 장애를 극복하려고 한다면 유니버설 디자인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이 유니버설 디자인의 소재가 된다. 샴푸와 린스의 용기를 구별하기 위해 샴푸의 뚜껑에 톱니 모양을 붙이거나, 자동차의 핸들을 상하로 조절해 ‘칼럼 미터’를 이용해 운전자에 맞게 계기판을 옮기는 식이다. 일반 건물에 계단과 경사로를 함께 만드는 것도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된 사례다.

“장애는 생활환경 때문에 존재”

최근 국내에서도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충남 천안의 나사렛대에는 ‘유니버설 디자인센터’가, 건국대에는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만들기 연구소’ 등이 들어섰다. 이들 연구소는 ‘장애는 사람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환경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연구·개발 활동을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환경은 사소한 배려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컨대 유니버설 디자인의 기능이 높은 엘리베이터를 아무리 많이 설치해도 적절한 위치 표시가 없다면 의미 없는 일이다. 공중화장실에 휴지걸이를 설치하는 데도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해 시각 장애인이나 한쪽이 마비된 사람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모전에서 ‘마음의 날개를 달다’는 제목의 장애체험 전시공간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상명대 실내디자인학과 나세환·김명훈씨의 지적은 시사적이다. “장애와 비장애의 소통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계단 대신 경사로를 만들고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전시하면 시각 장애인들도 미술관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각 장애인은 전맹일 것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시각 장애인 가운데 전맹은 10%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전맹인 사람을 배려해 유도블록이나 점자를 활용하는 것과 함께 빛과 색, 소재 등으로 저시력자를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유니버설 디자인은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사용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디자인의 사회적 구실을 실현하려는 기업이 많아져야 한다. 포드자동차의 디자이너들이 낙하산복 차림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선글라스를 끼고 일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령 운전자를 배려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려는 움직임이다. 일본만 해도 유니버설 디자인을 제품에 접목한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문구류 전문기업 고쿠요는 손가락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가위와 노약자를 위한 플러그 등을 선보였고, 마쓰시타전기산업은 드럼을 30도가량 기울인 세탁기를 개발했다.

설계도면 벗어나 제품에 적용되길

모든 사람을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은 설계도면 밖으로 나왔을 때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공모전 전시회장을 채운 것은 ‘시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젊은 상상력들이 현실화되려면 국내 기업들도 유니버설 디자인을 채택한 제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이범재 공동대표는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은 장애인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공모전에 선보인 작품은 유니버설 디자인이 널리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어요. 다음에는 기업들이 고유의 영역에서 개발한 유니버설 디자인 제품을 한데 모아 전시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