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50주년을 계기로 돌아본 ‘서사극’ 창안자의 삶과 문학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고 분쇄하는 문학의 힘은 여전히 유효해
▣ 김길웅 성신여대 교수·독문학
독일의 작가이자 시인이며 연극이론가였던
브레히트(Bertolt Brecht·1898∼1956)는 1898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1956년 베를린에서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두었다. 학생 시절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의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연극이었다. 20세기 서양 연극의 굵은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의 작가 세계는 그가 살았던 굴곡 많은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체로 1926년 이전을 이 작가의 초기로 평가하는데, 이 시기는 독일에서 표현주의의 자장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브레히트도 이 시절에 허무주의와 동시에 쾌락주의가 중심을 이루는 연극들을 선보이는데, 과 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귄터 그라스도 “실천 없었다” 혹평
그러다 시카고의 곡물시장에서 밀기울의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브레히트는 을 읽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문학 세계는 급격히 사회비판 내지는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경제공황의 그늘 아래에 놓여 있던 독일의 1920년대는 낡은 세계와 새로운 세계가 급격하게 교차하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였는데, 브레히트는 이 시대에 문학의 혁명적 기능에 골몰하며 “학습극”이라는 연극 형식을 발전시킨다. 이것이 브레히트 문학의 중기에 해당한다. 그러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과 더불어, 혁명의 기대는 무산됐고, “신발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며” 정처 없이 망명을 떠난다. 작품을 쓰면서도 언제 공연될지 모르는 망명 상황에 직면해 브레히트는 히틀러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작품 창작에 심혈을 기울여, 서사극 대작들을 선보인다. 과 같은 작품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 작품들을 썼던 시기가 브레히트 후기에 해당한다.
서양 연극의 원형이 감정이입과 정화작용을 양대 축으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마련됐다면, 브레히트는 20세기의 과학시대는 결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연극으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연극 형식의 실험으로 나갔다. 브레히트의 시각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터전을 둔 서양의 전통연극은 감정이입을 통해 관객의 비판적 기능을 말살하고,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확대재생산할 뿐이다. 따라서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무대의 사건을 낯설게 바라봄으로써(‘생소화’) 거리를 갖게 되고, 여기에서 이데올로기에 내재한 모순을 깨닫는 것(‘이데올로기 비판’)이 필요한데,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바로 이러한 작업을 지향한다.
브레히트의 시대가 끝난 지 벌써 5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그의 문학이나 세계관도 다소 낡았다는 혐의를 지워버리기 어렵다. 금세기 초에 서사극과 그 작용 원리인 생소화 효과를 무기로 이 작가가 실험했던 연극의 기법들, 예컨대 극중극(劇中劇), 개막사와 폐막사, 논평, 관객에게 말 걸기, 노래, 장면 제목과 전개될 내용 요약 및 선제시(先提示), 급격한 장면 변화 등은 이를 훨씬 능가하는 기법들이 속속 등장함으로써 그리 새롭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다소 찬반의 여지는 있겠지만, 그가 문학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던 “인간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세상” “친절한 세상”도 옛 소련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에서 많은 자극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1953년 옛 동독에서 노동자들의 봉기가 체제 위기로 내리닫던 시절에도 시위의 무력 진압에 동조해,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 수호에 앞장섰음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어디 그뿐인가? 작가의 정치적 소신과 행동 사이의 어긋남에 관해서도 의혹을 살 만한 부분들이 적지 않다. 이런저런 연유에서, 작가 개인의 인신에 관한, 노벨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의 혹평이 이미 60년대에 나왔다. 세계를 바꾸려는 거대한 야망이 현실에서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탁상공론으로 혹은 예술의 테두리 내에서만 그칠 뿐이라는 것이 조소의 골격이다. 그의 문학 수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들이 심심찮게 제기된다. 그 비판들은 대체로 브레히트의 작품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자의적이라고 폄하하는데, 그 이유를 이 작가의 작품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교리’를 선전하려 한다는 데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동구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계급투쟁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 변혁이 실패로 돌아간 현 시점에서 우리는 브레히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 작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브레히트가 받아들인 문화·예술적 유산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서사 미학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이었다. 작가 스스로 서사극을 변증법적 연극으로 이해하며, 변증법과 서사 미학 간의 연계점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려 한 흔적이 그의 전집에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도 그에게 변증법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방증한다.
브레히트는 변증법이 “굳어진 관념들을 해체하고,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서 실제를 관철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지배자가 제시하는 허위의식, 곧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주장이라는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데 변증법이 효과적이라고 브레히트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굳어진 관념, 곧 지배자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그 반대의 측면, 즉 실제를 대비해 관객 혹은 독자에게 스스로 올바른 결론을 내리도록 하는 구조는 브레히트의 거의 모든 작품을 일관하는데, 이는 변증법에서 말하는 모순의 법칙 내지는 정·반·합의 구도를 원용한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에 나오는 억척 어멈은 종군(從軍) 상인이다. 그녀는 전쟁이 일어나 군대가 출동하는 곳이면 거리를 가리지 않고 따라가서 술을 팔아 돈을 번다. 그녀가 그토록 억척스럽게 돈을 벌려는 이유는 돈을 벌면 행복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들을 따라다니며 돈을 버는 대가로, 그녀가 얻는 것은 사랑하는 세 자녀의 죽음, 곧 개인적인 불행이다. 이를 통해 돈을 벌면 행복할 수 있다는 억척 어멈의 믿음과 돈을 벌려고 할수록 불행해지는 그녀의 현실이 대조되고, 전자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허구, 곧 이데올로기임이 폭로된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브레히트는 이데올로기와 현실은 모순을 이룬다는 것, 그리고 이런 모순이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확신했다. “세계의 변화 가능성은 세계의 모순에 근거를 둔다”라는 브레히트의 진단도 이를 보여준다. 현실 비판은 심지어 그가 선호했던 동독의 사회주의에도 해당한다. 하향적 관료주의에 터를 두고 있던 동독의 사회주의가 여전히 계급사회임을 보여주는 다음의 시는 작가의 비판정신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무더운 날. 무릎엔 서류가방/ 나는 정자에 앉아 있다. 녹색의 배가/ 버들가지 사이로 시야에 들어온다. 고물엔/ 뚱뚱한 수녀 한 명,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 그녀 앞엔/ 수영복을 입은 꽤 나이 든 사내 한 명, 아마도 신부인 듯/ 노 젓는 의자엔, 온 힘을 다해 노를 젓는/ 소년 한 명. 옛날과 똑같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과 똑같아!” 무더운 날 두툼한 옷을 입은 신부, 곧 동독 정부는 소년의 노동 위에 군림하니 시대착오적이다.
사회 변화를 위해 모순 인식부터
브레히트의 문학이 지닌 시대를 넘어서는 생명력은 이데올로기를 분쇄하고 그 안에 숨겨진 모순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데 있다. 물론 모순의 인식이 사회 변혁과 직결되는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모순에 관한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브레히트의 문학은 사회를 변화시킬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브레히트의 문학과 그 방법론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하나의 근거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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