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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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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엔 불과 바람의 나라로!

등록 2006-09-30 00:00 수정 2020-05-03 04:24

긴긴 연휴 동안 방바닥에 배 쓸며 읽을 장편대하서사만화 총출동 …TV 퓨전사극의 원본인 순정 고대서사물에서 세련된 학습만화까지

▣ 김낙호 만화연구가

누가 뭐래도 한가위는 홍콩영화였다. 그리고 만화는 박봉성, 이현세, 허영만 만화였다. 오랜만에 내려가 재회한 친구들과 서로의 취향 따위는 따질 것 없이 단체로 영화 표를 끊었다. 물론 홍콩영화였다. 지금은 ‘가문’ 시리즈 등의 조폭영화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 같다. 만화는 무조건 대하장편이었다. 함께 가 만화책을 고르긴 하나 힘센 대학생 사촌의 힘이 제일 셌다. 마루에 수북하게 쌓아놓고 사촌들과 모여 돌아가며 읽었다. 1권부터 순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넘버 원 친척뿐이었다. 조무래기들은 다른 권을 한 권씩 꿰차고 뒤적거리며 1권이 나길 기다렸다.

두 달 전에 예약해도 해외로 떠나는 비행기 표가 없다는 긴긴 황금 휴가다. 미리 준비 못했다면 ‘방콕행’ 표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대장 노릇 할 만한 나이가 되었건만 호응해줄 친척, 조카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속으로, 애니메이션 만화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꾸무럭꾸무럭, 느릿느릿 방바닥을 쓸며 방바닥에 쌓아놓은 만화를 읽는다. 긴 만화일수록 좋다.고대사는 어떤가. TV를 고대사가 점령하고 있는데, 만화는 이미 ‘고래적에’ 그 선구안으로 그려놓았더랬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고대사의 매력은 요즘 만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쿠데타, 쿠데타 하는데 권력자들의 정권 ‘교환’ 말고 민초들의 진짜 쿠데타는 어떤가. 옛날 만화, 요즘 만화 망라하여 한가위에 배 쓸며 읽을 장편대하서사만화를 총출동시켰다. 만화삼매경 중 가끔 스트레칭을 하며 소화시키는 것을 잊지 말자.

섬세함과 선 굵은 서사의 만남

최근 수년간, TV 속 사극 드라마들은 기존의 권력암투 일변도에서 벗어나 섬세한 인간적 갈등과 애증을 녹여내는 ‘퓨전’ 방식이 돋보이고 있다. 이렇듯 섬세함과 선 굵은 서사가 조화를 이루는 역사물의 모델은 바로 순정만화에서 찾을 수 있다. (김혜린, 전 6권, 대원CI)은 순정만화가 대하서사물을 제대로 다룰 때 얼마나 멋들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선수 격이다. 이 작품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오는 상고시대를 무대로 하는 격정의 드라마인데, 여러 부족국가들의 치열한 투쟁과 그 속에 담긴 종교와 정치, 민중들의 삶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젊은 왕과 숙명 속에 고뇌하는 장군 등 무게감 있는 인물들과 함께, 부족의 운명을 결정할 철검을 만들어내는 가녀린 여성 대장장이라든지 종교지도자인 무녀 등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여성 캐릭터들이 특히 돋보인다.

(김진, 22권 발간 중, 시공사) 역시 이 계열의 내로라하는 명작이다. 이 작품은 일개 부족국가에서 대국을 향해 성장해가는 고구려를 무대로 한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되는 주인공 무휼을 중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대업과 개인적 고뇌 사이의 갈등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주몽과 꼭 닮았으며 부도에 고구려의 깃발을 꼽고자 하는 무휼의 꿈을 보좌하는 것은 사신수를 인격화한 매력적인 인재들이며, 나아가 자명고의 신화 역시 인간사의 드라마로 재해석돼 있다. 이렇듯 누구나 창작의 모범으로 삼고 싶어질 만한 독창적이면서도 원형적인 힘을 지닌 캐릭터들이 큰 매력. 다만, 두 작품 모두 상당수 성인 남성 독자들의 경우 순정만화의 그림 스타일이나 연출 방식에 낯설어서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뒤돌아서는 아쉬운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 작은 벽을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보람이 있을 것이다.

가상 활극모험물, 오혜성이 나라를 세운다?

대하서사물이라고 해서 항상 장중하고 무겁게만 즐겨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역사적 무게니 의미니 하는 것을 벗어던지고, 활극 또는 무협 모험물로써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작품들이 있다. (이현세, 전 29권, 컨텐츠와이드)은 만약 한국의 고대 상고사로 보겠다고 무게를 잡으면 오류투성이에다 지나친 민족주의로 점철된 당혹스러운 작품이겠지만, 모험활극으로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성인 극화다. 어디로 보나 ‘오혜성’에 가까운 단군왕검의 나라 세우기 활극은 이현세 특유의 남성적 에너지 과잉과 힘찬 비약으로 가득하다. 복잡한 생각보다는 시원시원한 재미로 후련해지고 싶을 때 적격이다. 그래도 역사적 사명이 자꾸 떠올라서 오락적 독서를 방해한다면, 아예 좀더 설정이 자유로운 다른 작품 가운데 선택해볼 수도 있다. (박중기, 전 9권, 학산문화사)는 상고시대를 무대로 한다. 이야기는 각 민족들이나 문명을 느슨한 상상력으로 만든 작품으로, ‘만신무사’라는 특수한 전사의 숙명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각 부족들 사이의 권력 싸움으로 전개된다. 만신무사의 피를 지닌 주인공과 그와 함께하는 이들의 격렬한 전투가 힘있는 필치로 전개되는 와중에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길산·임꺽정, 역사 속 ‘큰 도둑놈들’

역사를 다루는 대하서사물은 종종 역사를 만드는 자들을 권력자들에 한정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전념하곤 한다. 하지만 그 세계 속에 사는 민초들의 삶이 때로는 더욱 강렬할 수도 있는 법. 조선 후기 피폐한 시대에 분연히 일어난 두 도적의 이야기는 어떨까. 이들은 홍길동처럼 절대선의 존재라기보다는 지나친 피폐함이 싫어서 의적을 자처하고 더 나은 세상을 소박하게나마 만들어보고자 온 힘을 다해 노력하다가 산화한, 한국 문학의 굵직한 주인공들이다.

(백성민, 전 20권, 코믹플러스(온라인))은 한국화풍의 강렬한 선을 바탕으로 황석영 원작 특유의 민중적 분위기와 내용을 가감 없이 옮겨낸다. 끝없이 날아오르는 장산곶매의 전설로 장식된 서두의 치열함은 마지막 권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치도 줄어들지 않는다. 또 다른 유명한 도적이라면 바로 (이두호, 전 32권, 자음과모음)인데, 이두호의 만화는 홍명희 원작 이외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때로는 해학적으로 때로는 진중하게 그려지는 임꺽정과 청석골 두령들의 이야기는 한바탕 마당극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구월산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결말의 장엄함은 단연 백미.

이제 B급 아동학습 만화는 잊게나

연휴 동안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뭔가 배운 것도 있다고 자랑해야 ‘시간 낭비’를 안 했다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왕 무언가를 배우더라도 즐길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하서사물의 호흡을 가진 교양만화는 어떨까. 기억 속 고정관념으로 무슨 조악한 B급 아동학습 만화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중국 고대 창세 전설부터 한나라까지의 장구한 역사를 중요한 사자성어 에피소드로 나눠가면서 유쾌하게, 그리고 신랄하게 풀어나가는 (고우영, 전 10권, 애니북스)이라면 그 목표에 충실하게 부합된다. 혹은 좀더 한국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다면 (박시백, 7권 발간 중, 휴머니스트)을 추천한다. 정사에 충실하면서도 명쾌하게 당대의 권력관계, 사회적 맥락 등을 풍부하게 엮어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난 10년간의 인기 조선 궁중사극을 한꺼번에 보는 듯한 드라마적 재미 또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특징. 혹은 아예 스케일을 확 키워서 전세계, 전 인류의 역사를 대하서사로 읽는 것은 어떨까. (래리 고닉, 3권 발간 중, 궁리)는 미국에서 각종 교육 자료로 쓰일 정도로 높은 정보성을 지님과 동시에, 인류 문명의 전반에 대한 공평한 시각으로 이 세계의 가장 ‘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런 작품들을 독파하고 나면, 즐거움과 배움은 둘이 아님을 확실하게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채비 갖추었으면 빠져봅시다~

물론 모든 추천이라는 게 그렇듯 위의 목록은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즐기다 보면 더 많은 좋은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여하튼 동네 만화가게를 털어오든, 인터넷 만화방에 일일 결제를 하든, 아니면 과감하게 작품 전질을 박스 세트로 ‘질러’버리든(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채비를 갖추고 한번 스케일 큰 대하 만화의 세계로 빠져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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