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호 이지현씨의 재반론에 붙여 김남수씨가 말하는 동시대 한국 무용의 방향… 예술의 특권화된 영역 믿는 건 난센스… 현실 발언하는 문제적 춤 기다린다
▣ 김남수 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춤의 봄날이 오는가. 몸을 복권시키는 사상의 흐름과 함께, 기계문명의 반작용과 함께 춤은 새로운 빛을 받고 있는가. 분명히 21세기의 춤은 의식과 관념 과잉에 짓눌렸던 몸의 감각에 눈뜨면서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 무용계는 어떤가. 그러한 몸과 문명의 인식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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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는 몸이 세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미 춤추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몸을 쓰면서 살아가는 그 모든 것, 삶을 위한 몸짓이 모두 춤이라는 소박함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전히 춤추는 몸을 현실과 격절시키는 근대의 이른바 예술춤 관념이 지배적인 것은 아닐까.
낡은 예술춤 관념이 끈적끈적하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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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최근 한국 춤은 변화하고 있고, 세계 무대에도 속속 진출하며 그 고유성과 차이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안은미의 이나 김매자의 이 유럽 공연을 했다는 것이나, 정영두가 젊은 춤의 새로운 기수로 등장한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 결과는 유럽 공연 중심의 질서에 포섭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지만, 그것은 지나친 패배주의의 목소리가 아닐지. 이제 겨우 세계로 한 걸음 내디딘 것이며, 춤의 주체가 그런 열림과 나아감의 과정 속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 무용계의 전반에는 여전히 낡은 예술춤 관념이 끈적끈적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화, 미학화, 체계화된 이 춤은 스스로 예술의 자의식을 키워왔고, 그 과정에서 대중과의 소통이 끊어졌다. 춤의 힘줄은 대중과의 호흡인데, 그것이 끊어졌으니 당연히 생명력에 손상이 오는 것이다. 그 대신 지향한다는 내면이 현실과 무관한 무용가의 마음속에 갇혔을 때, 공허함은 필연이다. 예술가의 내면은 사회적 내면이어야 한다. 현재로선 내면적인 춤과 대중적인 춤이란 두 가지 규제 이념이 서로 상극이다. 물론 몸의 진실을 찾을 때, 내면적 깊이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몸의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세련되고 역동적인 춤을 추구하면 저절로 진정성을 얻게 되는가. 주어진 춤의 주름과 코드들을 버무려 내부적 혁신을 꾀하면 그것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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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근대 이후 우리 춤의 역사를 생각한다. 우리 춤은 신무용의 권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교태와 맵시를 섞은 형식미에 도취된 춤, 현실에 문 닫은 기방에서 눈앞의 지배 남성에게 호소한다는 춤의 멘탈리티는 그 자체가 우리 안의 식민주의였다. 건강한 삶의 정서나 긴박한 현실의 상황과 몸을 섞는 춤이 아니라 단지 유흥과 여기로 남은 춤,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욕망과 권력을 탐하는 춤이 그것이다. 그리고 미국 현대무용이 수용되는 과정 역시 추상표현주의와 기능주의로 한정되었다. 그 때문에 풍부한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담기보다 단지 춤의 기능적·미적 표현에 매몰된 것은 우리 춤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끼쳐왔다.
분명히 우리 춤은 우리 안의 식민주의와 싸우면서 몸과 세계가 결합된 춤의 고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처해 있다. 식민주의의 극복은 채희완 부산대 교수나 김매자 창무회 이사장에 의해 주도된 한국 창작춤이 그 일정한 결실을 낳았다. 탈춤을 비롯한 기층의 춤을 재발견하면서 자주적인 춤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제는 몸의 인식을 통해 안무의 드넓은 미지를 모험해야 한다. 몸이 존재하는 것은 추상적인 시공간이 아니며 구체적인 역사 안쪽이다.
기능과 형식은 그 역사의 상황을 마주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겨난다. 그 마주함의 시선이 투명한 응시이든, 불투명한 직관이든 상관없다. 안무는 그런 마주함 속에서 세계를 인식한 춤꾼의 안목이 펼쳐지는 과정이며, 실천적으로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춤의 입장은 안무를 관습적 체계 속에서 춤을 짜임관계로 직물화하는 기술주의로 보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이지현씨가 주장한 내재적 변화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에 불과하다. 내가 주장한 춤의 ‘바깥’은 ‘서구 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춤의 기원으로 돌아가서 동시대의 춤을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와 전쟁을 고발하는 살풀이 춤을
그렇다고 서구 춤에 눈감는 것이 자주성의 증명일까. 허약하지 않은 주체적 입장은 서구 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다시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 비추어 소화한 춤을 내놓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최근 서구 춤의 담론이 휴머니즘의 극복에 주력하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인간의 몸이 유기화되기 이전의 미완성으로 돌아가 자연과 인간을 다시 생각하는 시도가 발랄하다. 그 배경은 이성과 폭력이 결합한 이라크 전쟁이나 레바논 침공 같은 전쟁의 비극이다. 휴머니즘의 극복은 인간의 몸이란 오래된 윤곽을 지우면서 그런 파시즘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것 역시 유행 사조일지는 모르지만, 정치와 예술이 첨예하게 대치하며 현실에 참여하는 한 가지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시체나 동물처럼 널브러진 인간의 몸이 무대에서 발견되는 현상을 막연히 스쳐가는 것이 능사일까.
또한 우리 춤은 우리 몸의 재발견과 더불어 이 시대에 무엇을 발언해야 할까. 공허함은 발언이 없다는 것, 내용이 텅 비어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 순서가 고안의 과정이다. 여기서 춤이 현실에 참여하는 것을 프로파간다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단견이다. 무용가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황폐해지는 삶을 춤추고, 전쟁과 폭력을 고발하는 춤을 추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살풀이춤’이다. 수건을 허공에 뿌리며 테크닉을 뽐내고 아름다운 몸을 과시하는 관습적인 춤이 아니라 이 시대의 억울하고 기가 막힌 ‘살’을 풀어주는 ‘살풀이춤’이 되어야 한다. 춤의 본래 의미를 찾아 세계에 동참하는 시도를 폄하할 수 없다.
나아가 분단과 자본주의의 모순에 아랑곳없이 이미지 소비와 몸의 세공에 길든 현실을 비판할 수도 있다. 우리의 몸 쓰는 문화가 물든 욕망과 미디어에 대해 할 말이 왜 없겠는가. 예술과 삶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가 오래임에도 여전히 그런 현실을 떠나 예술로서 특권화된 영역이 있다는 믿음은 난센스이다. 그러니 예술춤 자체를 논하는 것도 거짓 문제이다. 봐야 할 것을 보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춤이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젊은 춤꾼들의 격렬한 눈뜸과 더불어 문제적 춤의 풍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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