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섹스를 향해 돌진하는 무쓸모고교 고딩들, 영화 …삐딱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원작 만화의 도발적 매력이 스크린으로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이 세상에는 ‘소녀’라고 불리는 종족이 있다. 이들은 세포의 갯수와 성질부터 다른 종족과 다르다. ‘소년’이나 ‘아저씨’ ‘아줌마’라고 불리는 종족에서는 종종 단순함의 결정체인 단세포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녀’들은 200여 종류의 서로 다른 감정과 생각을 가진 세포가 협력해 개체를 완성시키고 몸을 유지하는 순도 100% 다세포 동물이다. 만화가 B급달궁(본명 채정택)의 B급 만화 에는 대표적인 다세포 소녀들과 단세포 소년들이 모여 있다.
이 만화 속 소녀소년들이 , 의 이재용 감독 손을 잡고 스크린으로 자리를 옮겼다. 는 2003년 말 B급달궁의 손끝에서 시작됐다. 학습지 만화를 그리다가 습작 형식으로 그려본 이 만화는 B급달궁과 같은 B급 네티즌의 후원에 힘입어 2년 넘게 온라인에서 선전하고 있다. 만화는 아직도 연재 중이고 최근 단행본이 출간됐다.
여자 아니면 섹스 아니면 자위
B급달궁 마음대로 그린 만화에는 마땅히 줄거리랄 것도 없고 기승전결이랄 것도 없다. 줄거리나 흐름 대신 인물이 있다. ‘무쓸모고등학교’의 대표적 다세포 소녀인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우루사 광고에서 백일섭이 ‘피로’를 업고 다녔던 것처럼 지긋지긋한 ‘가난’을 업고 다닌다. 소녀의 고민은 언제나 가난에서 시작해 돈을 지나 원조교제에서 좌회전하고 짝사랑하는 부잣집 도련님 앞에서 빨간불, 정지신호를 받는다. 이 소녀의 세포 속에는 가난에 대한 열등감과 원조교제에 대한 죄책감, 예이츠의 시를 읽는 서정성까지 온갖 종류의 감정이 자리잡고 있다. ‘부회장 소녀’는 직책에 걸맞게 지배와 가학을 즐기고 ‘반장 소녀’는 반듯하고 수줍은 것 같지만(특히 과외 선생님에게) 중요한 순간에는 더러운 성깔이 있는 그대로 나온다. 뼈아픈 가르침마저 던져주는 여장남자 ‘두눈박이’는 단세포 소년에서 다세포 소녀로 거듭나는 ‘미래의 다세포 소녀’로, 만화 속 로맨스의 여자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세포 소년들도 만만치 않다. 소년들의 단 한 개뿐인 세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섹스’. 이 소년들은 단순하다. 여자(가끔은 남자) 아니면 섹스 아니면 자위다. 같은 반 어떤 여자도 함께 자고 싶어하지 않는 유일한 숫총각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는 ‘외눈박이’, 여자들이 왜 흰색 속옷만 입는지에 대해 깊고도 넓은 탐구를 펼치는 ‘테리’와 ‘우스’, 두눈박이에게 빠져버린 ‘명진’(영화에서는 안소니)까지 모두 여자 아니면 섹스 아니면 자위다. 몇몇 소년들은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진화하기도 하지만 정작 이들이 진화에 그다지 관심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는 줄거리에 따라 인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인물에 따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의 핵심은 소재가 아닌 태도다. 다세포 소녀와 단세포 소년의 삐딱하면서도 정곡을 찌르고, 쾌락과 돈에 솔직한 태도가 만화의 재미다.
영화는 만화의 에피소드를 거의 그대로 재현했다. 만화의 서정적인 그림체는 산뜻한 원색의 영상미로 바뀌었지만 만화 속 인물들의 독특한 정서와 대사는 영화에서도 빛을 발한다.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무쓸모고교 교가 합창 장면은 뮤지컬 영화로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노래방 화면처럼 연출한 장면이나 인터넷 게시판과 TV 프로그램 등 다양한 형식을 활용한 장면은 영화의 형식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이 감독의 재치로 읽힌다. 촬영에 정정훈 감독, 안무에 무용가 안은미, 음악에 ‘복숭아’의 장영규, 의상에 디자이너 서상영 등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도 참여해 스타일에서는 어긋남이 없다. 김옥빈과 박진우, 이켠, 이용주, 이은성 등 신인 연기자들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춘 연기를 선보인다.
흔들녀, 영화의 현실성을 흔들었네
영화에는 만화에 없는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무쓸모고교 학생들이 갑자기 하나둘씩 범생이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부회장 소녀와 반장 소녀, 테리우스 등은 이 비밀을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범생이로 교화시키려는 교장의 계략에 맞서 운동장 한복판에서 일사불란하게 동작과 구령을 맞춘다.
그런데 이 내용은 영화 속에서 혼란을 일으킨다. 영화 내내 각자 제 고민에 빠져 있던 소년소녀들은 범생이보다 더 무서운,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단결하는 고등학생으로 변한다. 확성기를 들고 교장을 향해 날카로운 한마디를 남기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하다. 만의 삐딱한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가 ‘흔들녀’로 일약 인터넷 스타가 된다는 내용도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현실적으로 느껴지던 소녀의 고민이 갑자기 허공으로 붕 뜨는 순간이다. 딱히 연결지점이 없는 만화의 에피소드를 큰 줄거리로 묶어야 했을 감독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더 산만해지는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다.
시사회에서 김옥빈은 “제가 ‘흔들녀’로 불릴 줄은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영화 홍보기간 내내 이 영화의 가장 큰 화제는 의 깜찍발칙함이 아닌 ‘흔들녀’ 김옥빈이었다. 김옥빈의 말은 마치 영화 속에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가 하는 말과 겹쳐진다. 영화에서 풍자하려는 사회의 단면이 현실에서 마치 재현이라도 하려는 듯 그대로 펼쳐지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이 영화가 ‘흔들녀’의 영화로 여겨질수록, 다세포 소녀가 단세포 소녀로 변해갈수록 영화는 점점 더 멀어져간다. 원작으로부터, 원작을 보고 영화를 선택한 관객들로부터, 다세포 소녀만의 그 태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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