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과 구타, 개그와 교태를 섞어 자극적인 설정 되풀이 …‘부모의 사랑’이란 명분으로 모든 걸 덮어버리면 그만인가
▣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인터넷 은어로 ‘낚시질’이라는 단어가 있다. 누군가 인터넷상에서 일반적인 여론이나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그에 반박하기 위해 몰려가고,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최근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한다거나, 헛소문을 퍼뜨려 굳이 욕을 먹는 ‘낚시꾼’들도 있다. 오죽하면 그런 ‘낚시꾼’들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옛다 관심’이란 말을 쓸까. 그런데 이 ‘옛다 관심’이 텔레비전으로 옮겨지면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온 국민의 관심이 월드컵에 쏠려 문화방송 드라마 마저도 월드컵에 밀려 결방됐건만, SBS 는 한 번의 낚시질로 월드컵 기간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주인공 자경(윤정희)의 출생의 비밀을 아는 소피아(이숙)가 드라마 속 개그 프로그램 을 보다 죽는 엽기적인 전개를 보여준 것이다.
물론 비난이 쏟아졌지만, 놀랍게도 는 슬금슬금 시청률을 올리더니 마지막 회에서는 무려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상식을 벗어난 설정이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월드컵 기간에도 드라마가 묻히지 않고 홍보된 것이다. 의 ‘낚시질’은 ‘중년 드라마’의 특징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의 엽기적인 죽음
를 비롯해 한국방송 등 일일드라마 혹은 주말드라마 시간대에 편성된 작품들은 쉴 새 없이 비난을 받는다. 는 드라마 시작부터 여고생 임신으로 논란을 일으키더니 최근에는 이혼당한 큰언니가 성폭행당할 뻔한 스토리로 비난을 받았고, 은 매회 불륜 아니면 폭력으로 이혼하는 부부들 얘기다. 또 은 바로 전작 와 지나치게 비슷한 설정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드라마들엔 그런 논란이 오히려 ‘보약’이다. 인터넷이나 케이블 방송이 아직 낯선 중년 시청자는 여전히 공중파 방송 드라마를 즐겨본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 같은 ‘마니아 드라마’는 받아들이기엔 너무 동떨어진 감수성을 가졌다. 드라마는 보고 싶은데 그들을 만족시켜주는 드라마는 없다. 그래서 중년 드라마를 찾고, 그중에서도 더 ‘센’ 걸 찾는다.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가 지금처럼 독해지고 그럼에도 높은 시청률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마니아 드라마’가 활성화되기 2~3년 전부터다.
중년 드라마들은 중년의 모든 욕망을 채워준다. 와 를 보라. 거기엔 불륜이 있고(멜로), 악녀를 응징하기 위해 야구방망이를 들고 집에 쳐들어가 모든 걸 부수는 남자가 등장하며(액션), 개그 프로그램을 보다 죽는 여자(호러)와 진짜 ‘첫날밤’을 치르자며 어울리지 않는 교태를 부리는 여고생(에로틱 코미디까지!)이 등장한다. 또 숨이 차는 사람에게 ‘단전호흡’을 하라며 건강상식도 알려주고, 갑자기 군대에서 ‘꼭짓점 댄스’를 추며 젊은이들의 ‘유행’도 선보인다. 중년 시청자는 이 드라마 한 편이면 오락과 정보가 모두 해결된다. 또 이런 드라마들은 대개 50회 이상을 끌고 나가야 하는 주말드라마나 일일드라마에 편성되니 처음부터 끝까지 탄탄한 구성을 가진 스토리를 짜내기 힘들다. 스토리는 천천히 진행시키는 대신 필요할 때마다 자극을 주는 해프닝이나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시청자는 거기에 ‘낚인다’. 물론 이런 모든 자극적인 설정들에는 명분이 들어선다. 그게 바로 ‘부모의 사랑’이다. 20여 년 전에 버린 친딸을 의붓아들과 결혼시키는 나,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자식들의 문제를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는 의 어머니나, 눈물겨운 모성은 논란을 잠재우는 만병통치약이다. 아니면 처럼 온갖 끔찍한 이혼 사례를 보여준 뒤 ‘부부간의 정을 생각해보라’라는 한마디로 덮으면 될 뿐이다. 그래서 중년 드라마는 사회에서 차마 내놓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욕망과 자극들을 떳떳하게 내보일 수 있는 구실을 한다. 중년 드라마는 좀처럼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없는 중년 시청자의 욕망의 분출구인 셈이다.
속물적인 욕망에 대한 정당방위로 작용
그러나 ‘옛다 관심’으로 살아가는 중년 드라마들은 욕망을 멋진 판타지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욕망의 배설구에 머무른다.
처럼 딸을 ‘좋은 데’ 시집보내면서 자신도 첫사랑과 결혼하고 싶은 욕망, 처럼 며느리에게 빚을 내야 할 정도로 무리한 혼수를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코믹하게 ‘시어머니의 요구’쯤으로 묘사하는 속물적인 욕망은 부모의 자식 사랑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고, 우리가 현실의 그릇된 욕망과 편견에 둔감해지도록 만들며, 그 둔감함은 다시 더 이들 드라마가 더러운 욕망을 끄집어내어 정당화해주길 바란다. 임성한 작가의 작품이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하고 시청률도 그만큼 올라가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중년 드라마는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낚시질을 한다. 어째서 우리는 드라마에서 중년의 ‘명예’와 ‘삶의 철학’ 대신 ‘욕망’을 선택하게 됐을까. 의 원작이 방영될 때만 해도 자존심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주인공들이 살아 있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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