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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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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도 아이들의 신나는 예술여행

등록 2006-07-14 00:00 수정 2020-05-03 04:24

작가들과 함께 한 서해안 섬마을의 ‘우리 동네 발견’ 프로젝트… 고려시대 항몽전쟁 별궁 터 만들고 마을의 전설을 동영상으로

▣ 장봉도=글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인천도화초등학교 장봉분교는 아담한 교사에 잔디 운동장까지 있다. 뛰노는 데는 남부러울 게 없는 섬마을 아이들. 이들이 하루 동안 ‘신나는 예술여행’을 마친 뒤 마을 어른과 부모들 앞에서 색다른 변신을 선보였다. 지난 7월4일 오후 내내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으로 마을을 누빈 김바다군은 빔 프로젝트를 통해 스크린에 나오는 자신의 작품을 보며 스스로 대견스러워했다.

아이들을 만나 자신의 개인사를 넉넉하게 풀어놓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새삼 친근하게 다가섰다. 장봉분교에 다니는 스물세 명의 아이들 모두가 예술가로 ‘데뷔’한 뜻깊은 날의 저녁은 축제의 밤, 바로 그것이었다.

D-30일: 섬마을 축제가 싹트기까지

신나는 예술여행은 문화적으로 소외된 집단을 위해 이뤄지는 사업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국무총리 복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소년소녀 가장이나 저소득층, 산간·도서 지역 주민 등 문화예술을 체험할 기회가 드문 이들을 위한 것이다. 미술인회의 지역네트워크분과위원장이자 인천 지역에 뿌리를 둔 대안미술활동 커뮤니티 ‘스페이스 빔’의 디렉터 민운기씨의 관심은 ‘문화 향수’에 머물지 않았다. “도시민의 관점이나 특정 예술이념의 잣대로 문화 소외를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공동체 의식에 바탕한 전통문화를 간직한 섬마을의 특성을 살린다면 보여주는 문화가 아닌 생동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런 고민 끝에 ‘우리 동네 재발견’이라는 프로젝트가 나왔다. 오로지 여름 휴가철에만 피서객들로 북적대는 서해안 도서 지역 5곳(장봉도·덕적도·이작도·승봉도·자월도)을 축제의 마을로 선정했다. 그곳 주민들이 마을을 문화적으로 재발견한 결과물을 축제의 자리에 풀어놓는 것이었다. 미술을 통한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가치를 재생산하려는 ‘미술인회의’와 ‘스페이스 빔 커뮤니티’ 회원 20여 명의 작가가 도우미로 나서기로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지난 5월 장봉도를 사전답사하면서 고려시대 항몽전쟁 때 강화도로 천도한 뒤 장봉도 국사봉 자락에 세웠다는 별궁 터를 찾아보는 등 마을의 역사와 환경, 생태 등을 파악했다. 풍성한 축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D-1일: 설렘을 싣고 장봉도에 가다

그야말로 상상력의 축제여야 했다. 축제 도우미들은 장봉도 사람들보다 장봉도를 많이 알아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지역연구 공동체 ‘모닥’이 장봉도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을 추적한 보고서를 입수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는 크고 작은 변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큐레이터 성충경씨는 별궁 모형 만들기를 진행할 방법이 막연하기만 했다. “장봉도에 별궁을 세웠다지만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상상력만으로 별궁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모양이 나올지 예상할 수 없다. 모형을 만드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생각을 반영해 꿈을 새기는 식이 될 듯하다.”

이에 견줘 마을의 전설과 구전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제작할 ‘C급 무비’ 감독 백승기씨는 초보 연기자를 만날 기대감만 있었다. 캠코더로 찍어서 컴퓨터로 편집해 소통하도록 한다는 의미의 ‘C’와 빨리 찍는다고 ‘급’을 합한 ‘C급’ 감독답게 시나리오와 소품 준비도 끝낸 상태였다. 섬마을 아이들의 ‘연기력’도 문제될 게 없었다. 2~3분 분량의 작품을 줄기차게 찍으면서 현장 연기 지도 노하우를 충분히 터득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영상으로 만들 작품이 장봉도에 관한 것이기에 배우들이 친밀감을 느끼며 연기에 임할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초딩 배우’를 만난다는 설렘 속에 장봉도의 첫날 밤이 깊어갔다.

D-day: “우리가 예술가로 거듭났어요”

장마는 장봉도를 피해가지 않았다. 가는 빗줄기 속에 축제의 날이 밝았다. ‘신나는 예술여행’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단체 티셔츠를 입은 장봉분교 아이들과 도우미들이 학교 교실에서 축제를 준비했다. 수업 시작 벨이 울리지 않는 가운데 일과를 시작하는 아이들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오전 프로그램은 ‘우리 동네 지도 그리기’였다. 1학년 유진이에서 6학년 연선이까지 모두 23명의 어린이가 교실 바닥을 캔버스로 삼아 마을 안팎의 이모저모를 그리기 시작했다. 도우미들이 밑그림을 그리면 꼬마 화가들이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 마을을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는 식이었다.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에 장봉도의 그림지도가 완성됐다.

오후 프로그램은 모둠별로 진행됐다. 교실 한쪽에서는 별궁 모형을 만드는 동안 현장미술 모둠과 마을의 전설 동영상 제작 모둠, 다큐멘터리 제작 모둠 등은 마을 곳곳을 누볐다. 현장미술 모둠은 마을의 독특한 구조물을 직접 몸으로 재현하는 1분 조각 만들기를 진행했고, 동영상 제작 모둠은 빗줄기에 따라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사라진 비석’과 ‘대빈창 도깨비’ 등 5편의 동영상을 찍었다. 다큐멘터리 촬영 모둠은 마을 어른들을 만나 개인사와 민요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른들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엔 입이 떨어지지 않던 6학년 김혜영양. 그가 다섯 번째 순서로 정을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땐 훨씬 자연스러워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그토록 여름 해가 짧은 줄 장봉도 아이들은 몰랐으리라. 꼬박 하루 동안 아이들이 마을을 재발견했다면, 도우미들은 섬마을 아이들의 ‘끼’를 확인했을 것이다. 섬마을 아이들의 친구가 되려 한 미술작가들이 도우미 노릇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축제 만들기는 단지 하루의 추억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 동네 재발견’팀은 이날의 인연을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고 앞으로 아이들과의 연대를 모색할 예정이다. 섬마을의 축제를 준비하는 신나는 예술여행은 이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이달 중순엔 덕적도의 아이들이 마을을 재발견할 기회를 갖는다. 섬마을 축제의 밤이 다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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