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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가림막, 공공미술의 진화

등록 2006-06-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작가들의 참여 끌어들인 신도시 공사장 아트펜스 1Km…“30~60m를 화폭으로 삼아 공공적 발언 하는 건 새로운 경험"

▣ 판교= 글·사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대부분의 기업은 미술품 설치를 통해 사무공간 안과 밖에서 세련된 분위기를 꾀한다. 기업 공간을 갤러리 벽면이나 미술관 공간처럼 꾸미도록 하는 ‘1% 미술’도 시행되고 있다. 이는 기업의 문화적 표정을 만드는 구실을 하고 있다. 대기업일수록 깔끔한 표정을 생각하며 현대미술의 아우라를 덧입히려 한다. 일부 기업은 수십억원을 들여 초대형 조형물을 세워 추상적 표정을 짓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환경 조형물에서 공공성을 찾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기업이 공공성을 떠올리기 전에 작가의 권위와 상업성이라는 잣대에 휘둘리는 탓이다. 여기에서 공공미술의 본래적 의미가 살아 있을 리 없다.

작가 10명, 단체 5팀 참여, 2년간 전시

정말로 기업과 미술 작가의 아름다운 만남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기업인들이 세금처럼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이른바 ‘준조세 미술’로 공공성을 발휘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정부나 행정기관이 공공미술의 모범을 보인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기업에 공공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토지공사 판교사업단 윤여산 단장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공사 현장에 미술 작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대규모 개발사업이 파괴만 일삼는 게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계기일 수도 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작가들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요즘 판교신도시 개발 부지인 윤중로 가로변에는 예술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모두 13km에 이르는 공사장 펜스의 일부(1km)에 작가 개인과 단체들이 그림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토지공사 지원으로 경원대 퍼블릭디자인혁신센터가 기획한 행사는 ‘길-자연과 문명 사이를 걷다’를 주제로 작품을 설치해 앞으로 2년여간 전시될 예정이다. 여기에는 국내외 작가 10명과 대학별 단체 5팀 등이 참여한다. 영국의 마고 배너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에밀 고, 동양화가 강영구씨, 설치작가 안성희씨 등도 있다. 국경과 장르를 초월해 가림막 펜스의 예술적 진화를 시도하는 셈이다.

이들은 도로변 가림막 펜스에 다양한 작품을 실사출력하거나 부착하는 공공디자인을 선보인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설치되는 만큼 공사현장이 예술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오는 6월8일에는 ‘국제 아트펜스 디자인 초대전’으로 펜스 개막식도 열린다. 눈썰미 있는 운전자라면 차를 세우고 인도를 걷는 즐거움을 느껴볼 만하다. 경원대 퍼블릭디자인혁신센터 홍의택 교수는 “작가들이 대중을 만나는 소통 창구가 넓어진 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30~60m의 공간을 화폭으로 삼아 공공적 발언을 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고 말한다.

이런 가림막 펜스 그림은 처음 시도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건설사가 서울 강남권 재건축 공사 현장에 벽화를 시도했다. 콘크리트 도시에 예술적 가치가 있는 미술품을 남겨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작가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공공미술 단체들이 지역사회 봉사 차원에서 참여했던 것이다. 또 홍익대 앞 등 도심 공사장의 가림막에도 형형색색의 디자인이 등장하지만 상업광고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이에 견줘 판교신도시 가림막 펜스 작업에는 전문 작가들이 참여해 가림막의 격을 전시장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가림막 펜스의 예술적 진화인 셈이다.

나머지 12km에서,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다면

일부 젊은 작가는 그래피티(Graffiti·길거리 낙서문화)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개성을 공공 영역에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은 거리에 다양한 표정을 풍덩 빠뜨리는 ‘플롭 아트’(plop art)에 가까울 수도 있다. 빌딩 숲 사이를 매우는 작가의 획일적 조형물도 마찬가지다. 판교신도시의 아트펜스는 플롭아트일까, 공공미술일까. 이에 대한 답은 대중의 관심과 참여의 정도에서 나올 것으로 보인다. 판교신도시의 남은 12km의 가림막이 ‘아트펜스’로 채워진다면 공공미술의 진화를 기대할 수도 있다. 가림막 펜스가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는 풍경이 또 다른 공간에서 재현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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