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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남주의 췌장암

등록 2006-04-28 00:00 수정 2020-05-02 04:24

▣ 서홍관 국립암센터 의사·시인

김남주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봄이었다. 남민전 사건으로 9년3개월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지 얼마 안 된 김남주 시인이 서울대학교병원으로 나를 만나러 왔다. 1970년대를 김지하가 떠받치고 있었다면, 80년대는 김남주가 떠받치고 있다고 할 만큼 김남주는 이미 문단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1985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한 신출내기 시인이었던 나는 김남주 시인을 직접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자못 흥분해 있었지만,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두통과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고, 오랜 기간의 감옥 생활 뒤끝이라 뭘 해야 할지 갈등을 겪는 과정의 문제로 판단됐다.
그 뒤 김남주 시인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가끔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번은 연세대 강당에서 5·18 기념 시낭송대회가 있었는데, 나는 전두환씨를 정신질환자로 풍자한 졸시 ‘환자 증례 보고’를 낭송하게 되었다. 그날 나에게 낭송하는 속도와 억양까지 세세히 지도해주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런저런 인연 때문이었는지 그는 아들 토일의 돌잔치에 목동 집으로까지 나를 초대한 적도 있었고, 강화에 사는 천승세 선생님 댁에서 젊은 문인들과 함께 하룻밤 질펀하게 논 기억도 있다.
그러던 1994년 4월, 오랜만에 연락을 한 김남주 시인은 속이 불편하고 체중이 3∼4kg이 빠졌다며 나를 찾아왔다. 나는 걱정이 되어 내시경을 비롯한 온갖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며칠 뒤에 나온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식사는 잘하는지 잠은 잘 자는지 확인했는데, 잠을 설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한다면서 체중 감소는 아마 그 때문인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몸 관리 잘하시라고 말하고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그 뒤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데 그해 11월이던가 김남주 시인이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아 광주로 자연요법 치료받으러 내려갔다는 말이 들려왔다. 췌장암이라니, 그리고 말기라니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린가. 자세히 물어보니 나를 만난 뒤에도 체중이 계속 내려가서 10월까지 10kg이나 빠졌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내과 의사에게 초음파 검사를 받았는데 정상으로 나와서 안심하고 지내던 중 11월께 황달이 발생해 다시 검사를 한 결과 췌장암 말기로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당시 체중 감소가 이미 시작됐는데 4월에 혹시 췌장암을 진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췌장암은 워낙 크기도 작고 복강 깊숙이 숨어 있어서 조기 진단이 어려운 암이다. 나는 서울의대 교수로 계시는 선배에게 이 일을 상의했다. 그 교수는 서울의대 학장을 지낸 ㅅ 교수가 복부 통증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을 때 최고의 명의들이 진찰했는데 담석증으로 오진을 해서 담낭절제술을 받아 퇴원했다가 통증이 계속돼 재입원했는데 췌장암 말기로 발견되어 한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는 얘길 해주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마음으로 깊이 따르던 선배의 병을 놓쳤다는 자책감은 나를 짓눌렀다. 김남주 시인이 사망한 날, 아마 나는 가장 먼저 전화를 받은 몇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새벽에 전화를 받았으나 서울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 갈 수 없었다. 저녁 늦게야 찾아갔고, 영안실에 오래 있기 힘들었다. 상처가 깊었던 탓이다. 얼마 전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보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남주 시인은 지상에서의 삶이 너무 혹독했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지난 생애와 화해하셨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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