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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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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옥의 뜨거운 심장을 아세요?

등록 2006-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세월이 갈수록 현명해져가는 드라마 <굿바이 솔로>의 그 여자… 무당이기보단 고뇌하는 인간적 배우의 마흔 셋이 아름답다

▣ 백은하 <씨네21> 기자

한낮의 재즈바. 너무 인공적이어서 조잡해 보이기까지 하는 에메랄드빛 칵테일을 앞에 놓고 한 여자가 책을 읽고 있다. 밑줄을 치고 중얼중얼 혼잣말도 곁들여가며. 그러나 그녀가 골똘히 읽고 있는 책은 폴 오스터도, 코엘료도, 헤세도, 이해인도 아니다. 바로 홈쇼핑 가이드북이다.

한국방송 미니시리즈 <굿바이 솔로>에서의 배종옥, 아니 오영숙은 늘 이런 식이다. 세상사 고통을 다 짊어진 어두운 눈빛을 하다가도, 이렇듯 엉뚱하게 사람의 힘을 쑥 빼버린다. 화려한 옷차림에 진한 화장을 한 채, 허름한 백반집 할머니와 볼을 비비고, 남편에겐 주눅들어 찍소리도 못하다가, 외간 남자가 녹차를 시키면 여기는 커피가 맛있다고 자기 맘대로 주문해버리는 막무가내인 여자다. “뭐 저런 년이 다 있어?” 쳐다보면 “신경끄셔!” 대답이 날아올 것처럼 까칠하다가도, 상처 입은 자들에겐 어머니 같은 품을 열어 끌어안아버리는 다정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어쩌면 어쩌면 미친 여자다.

장황한 배우론은 없다, 그냥 물같다…

그러나 배종옥이란 배우를 실제로 만나면 좀 당황하게 된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성격 있는’ 여자 대신 도통 속내를 알 길 없는 여자가 눈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배우는 장황하게 배우론을 늘어놓지도, 넘쳐나는 끼나 감수성으로 함께 있는 사람을 즐겁게 만들거나 울리지도 않는다. 거만하지도 겸손하지도 폐쇄적이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색도, 향도, 맛도 없다. 그냥 물 같다. 그러나 이런 물 같은 천성이 이 배우가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배종옥’을 드러내지 않고도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법을 알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기엔 <거짓말>의 성우가, <바보 같은 사랑>의 옥희가, <질투는 나의 힘>의 성연이, <굿바이 솔로>의 ’오 여사’가 있을 뿐이다.

물론 배종옥 하면 여전히 <도시인>이나 <목욕탕집 남자들> 등의 드라마에서 나왔던 똑부러지는 커리어우먼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동그랗고 귀여운 눈을 크게 뜨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사를 숨도 쉬지 않고 늘어놓던 그녀는 ‘대사발’ 좋은 작가들의 애장목록 1호였다. 그러나 그 빈틈없이 견고했던 한 여자가 사랑 앞에 와장창 무너져서 “사랑이 또 온다고 말해줘, 또 온다고~” 하며 울먹이던 <거짓말>의 그 순간에, 우리는 알아버렸다. 이 얄미운 모범생 같은 여자에게 심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뽀글뽀글 파마를 하고 봉제공장 미싱 보조로 등장해 세상 사람 다 말리는 ‘바보 같은 사랑’에 빠져버렸을 때 우리는 알아버렸다. 이 손해볼 짓 안 할 것 같던 깍쟁이에게 순정이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잘 배워서 똑똑하고 쿨한 여성을 연기하던 그녀는, 이제 세월이 갈수록 잘 늙어서 현명해져가는 뜨거운 여자를 연기한다.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이 언제나 쿨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진짜 쿨한 게 뭐냐면, 진짜 쿨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게 진짜 쿨한 거야”라는 노희경 작가의 대사가 배종옥의 입을 통해 나오면 우리의 오랜 오해는 그렇게 눈 녹듯 녹아버린다.

1964년생, 올해로 마흔셋에 이른 배종옥은 더 이상 ‘푸른 해바라기’같이 해사한 소녀도, ‘걸어서 하늘까지’ 뛰어갈 듯 파닥거리던 ‘날치’ 같은 청춘도 아니다. “나이가 들면 누나처럼 명쾌해지냐?”고 묻는 어린 것에게, “지금 이 순간, 이 인생이 두 번 다시 안 온다는 걸 알게 되지”라고 담담히 말하는 늙은 것이 되어버렸다. 지난 10년간 배종옥과 함께 작업해온 노희경 작가는 배종옥에 대해 “타고난 재주도 끼도 전혀 없는 사람이다. 코가 예쁜 걸 제외하면. (웃음) 배종옥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게 없는 사람이 노력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또 “개인적으로 끼로 연기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편이다. 그게 넘쳐버리면 배우가 무당 같아져버린다. 나는 무당보다는 그저 고뇌하는 인간인 배우가 좋다. 배종옥은 그 나이에 대학에 가서 계속 공부를 한다. 촬영장에도 가장 먼저 온다. 자기 신이 많다 적다 한마디 하는 적이 없다. 그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나를 순간순간 고민하고, 한순간도 대충 살지 않는 여자다. 끼가 넘쳐나는 배우는 옆사람을 주눅들게 하지만, 노력하는 배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그 나이쯤 되면 그동안 쌓아논 것으로, 이름값으로 대충 먹고살지만 배종옥은 끊임없이 벌어나가고 있는 배우란 생각이 든다. 나잇값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에 나잇값을 하는 배우다. 그녀가 늙어가는 걸 보는 재미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저런 동료를 가진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10년 작업한 노희경 작가 “힘을 주는 동료"

한때 나이가 들어가는 건 더 강해지고, 더 독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유약했던 청춘을 부끄러워하고, 우유부단했던 젊음을 버려야만 쟁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더욱 동글동글해지는 배종옥의 얼굴은 각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렇게 배종옥이란 배우의 존재는, 모든 늙어가는 것들에게 내려진 희망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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