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브로크백> <히미코> 등 세편의 퀴어영화를 본 게이들의 수다
동성애 판타지를 느낄 수 있는 기회, 우리 사회는 호모포비아를 떨칠 것인가
▣ 사회·정리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농담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미·일 퀴어영화 3부작이 완성됐다. 한국의 <왕의 남자>, 일본의 <메종 드 히미코>(이하 <히미코>), 미국의 <브로크백 마운틴>(이하 <브로크백>). 동성애 주인공이 나오거나 동성애 관련 내용이 들어간 세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을 했거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껏 ‘드문’ 일이다. 게이 관련 영화의 개봉이 이어지는 가운데 세 영화를 보는 게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명안, 기호, 수연. 동성애자인권운동에 관여하거나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남성 동성애자(게이) 세 명이 모여서 수다회를 가졌다.
이준기가 왜 좋냐고 물었더니…
사회 <왕의 남자>가 1천만 관객 흥행을 했다. 왜 이렇게 많이 봤다고 생각하나?
명안 초반에 ‘야오녀’들이 바람몰이를 확 해준 것 같아. 공길 캐릭터가 일본 야오이 만화에서 수(여자) 역할 같은 거니까.
기호 요즘은 덜하지만, 예전에는 만화 대여점의 절반이 레인보우(동성애)물이었다. 그때 그 친구들이 나이가 들면서 영화의 주요 관객층이 된 거지.
수연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동성애자로 정체화된 주인공이 나오는데도 이 영화를 둘러싼 담론들은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번지점프를 하다> 때만 해도 동성애 코드가 큰 문제가 됐는데. 그렇다고 이 사회의 관용이 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말이야.
명안 사극이라는 장르가 큰 구실을 한 것 같아. 사극이라고 하면 당대의 현실이 아닌 거잖아.
기호 ‘쟤가 우리 오빠야’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거지.
사회 <왕의 남자> 바로 전에 개봉했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하 <일주일>)에서는 게이 남성끼리 부대끼는 장면만 나와도 관객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왕의 남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수연 과도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 영화 보는 데 방해가 될 정도였어.
사회 <왕의 남자>는 퀴어 코드가 들어 있는데도 국민영화가 됐는데, 동성애 혹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묘한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하고 있다고 보지 않나?
명안 나도 그런 의심을 해본 적이 있는데, 과연 한국에서 그럴까? <왕의 남자>는 사극이니까 남성 관객들이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증명하면서 동성애혐오증(호모포비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어기제가 있긴 하지. <일주일>은 현실적이지만 <왕의 남자>는 사극이니까 한 걸음 떨어져서 볼 수 있잖아.
수연 이준기가 정말 중요한데, <일주일>에서 게이로 나온 천호진은 판타지가 되지 않지만, 이준기는 판타지의 가능성이 있어. 여자친구들한테 왜 이준기가 좋냐고 물어봤더니, 쇠골이래. 우아한 어깨선.
기호 <로드 무비> <번지점프를 하다>는 포스터에서 남성다움을 강조했지. <왕의 남자>는 아예 포스터부터 여성 같은 공길을 부각해서 남성성을 배제시킨 너무 이쁜 인물로 만들어버린 거지. 공길이 조금만 남성스럽게 굴었어도 관객 1천만은 어렵지 않았을까.
사회 <왕의 남자>의 흥행이 동성애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칠까?
명안 아유 불쌍한 것들, 쯧쯧쯧, 그 정도겠지.
기호 <왕의 남자> 한 편만으로는 힘들지. <브로크백> <히미코>까지 아우르면서 뭔가는 있을 수도 있고.
명안 <왕의 남자>가 오히려 편견을 조장할 수도 있잖아. 게이들은 다 예쁘고 여장 하고 다닌다고. 대표적인 게이 판타지지.
수연 홍석천의 커밍아웃이 한국 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을 5년 앞당겼다고 생각하는데, 게이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아. 설령 공길 때문에 인식이 바뀐다고 해도 나는 그런 방식에 대해 약간의 반감 비슷한 것을 가질 것 같아. 그러면 우리는 액티비스트들 대신 로비스트들을 양성해야 될 것이고.
40대 이후 게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인기투표를 했다. 세 영화 중에서 세 사람이 가장 좋아한 영화는 ‘대략’ <브로크백>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히미코>의 오다기리 죠였다. <히미코>는 성소수자 실버타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늙은 게이(혹은 트랜스젠더)의 군상이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구슬프게 펼쳐진다. 게이 아버지와 딸의 화해 이야기도 담고 있다. <히미코>를 통해 게이로 늙어가는 일에 대해 들어보았다.
사회 <히미코>의 어떤 점이 좋았나?
명안 일단 나이든 게이들의 공동체라는 설정이 좋았다. 우리에게도 아직은 아니지만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사실 거슬리는 부분도 있었다. 게이들 이야기라고 했지만 사실 트랜스젠더 이야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노인 캐릭터도 수동적이다. 세상을 달관했음직한데도 여전히 세상을 두려워하고 자식에게 아우팅할까봐 두려워하고.
기호 다양한 게이 노인들이 있음에도 여성화되고 싶어하는 캐릭터만 부각됐다.
수연 처음에 봤을 때 가족 얘기가 불편했다. 속으로 또 가족 얘기야, 그랬다. 두 번째 보면서 주목한 것은 여성이 게이 커뮤니티에 들어왔다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끝난다는 것이었다. 내러티브 자체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히미코>를 둘러싼 여성 관객성에 대한 어떤 의식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히미코>는 어떻게 보면 패그해그(faghag·게이(문화)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이성애자 여성) 판타지인데, 영화는 이들의 판타지를 만족시키면서 종결된다. 패그해그들은 어느 정도 게이 하위문화의 일부를 만드는 데 많은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이들이다. 한국계 미국 코미디언 마거릿 조의 농담. “패그해그는 게이 커뮤니티의 백본(Backbone·뼈대)이다.”
사회 대담자 중 30대가 많은데, <히미코>를 보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나?
명안 그럴 줄 알고 갔는데,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성애자 관객이나 젊은 게이들이 보면 게이로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수연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대학생들이 실버타운에 놀러와서 해변가로 뛰어가는 장면이다. 그것 때문에 두 번 봤다. 그 장면은 뭐랄까, 게이 커뮤니티의 감성이라고 할 수 있는 멜랑콜리를 드러낸다. 소녀적 감수성이 넘쳐나는 게이 사이트 게시판의 글과 통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베니스의 죽음>의 지독한 게이 감수성과도 맞닿아 있다.
사회 게이라서 늙어가는 것에 대해 각별한 두려움을 느낀다고 생각하나?
명안 전 안 늙어요. (일동 웃음)
수연 난 있어. 서울의 게이바에서 보는 게이들은 대부분 30대 중반까지의 사람들이다. 40대 이후의 게이들은 어디에 갔을까. 나처럼 커뮤니티에 친숙한 사람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어떤 게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족이 없으니까, 늙어서 비참해지면 안 되니까 젊을 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이해는 가고 맞는 말이긴 한데, 조금 거슬려.
명안 나이들어서 조용한 곳에 모여 살자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도 많다.
사회 영화의 또 다른 축인 게이 아버지와 딸의 화해는 어떻게 봤나?
명안 이상하게 잘 생각이 안 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게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면 막상 젊은 게이와 딸의 관계가 너무 크게 다가온다.
사회 왜 기억이 안 날까?
명안 우리가 게이라서 그런가.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싶은 문제라서 그런가.
산을 사랑하는 게이들은 변태?
<히미코>가 게이 실버타운에 대한 이야기라면, <브로크백>은 게이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브로크백>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두 카우보이 사나이의 20년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잭(제이크 질랜홀)과 에니스(히스 레저), 두 카우보이는 1960년대 20대 초반에 만나서 사랑을 느끼지만 각자의 가정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들은 한 해에 서너 번씩 처음 만났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남을 이어간다.
사회 <브로크백>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게이 멜로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울었다는 사람이 많던데.
명안 감정이입도 잘되고 슬픈 멜로 영화니까.
기호 나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60년대 미국의 농촌에서,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축복 아니었을까.
수연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기호 친구들이 생각났다. 결혼한 게이 친구들도 있다. 처음에는 그들이 짜증났다. 결혼한 친구 한 명이 게이바에서 노래 부르는 걸 보면서 구슬프다고 느꼈다. 그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뭐였을까. 안스러웠다.
명안 산이 주는 시각적인 쾌감도 무시할 수 없다. 누구나 살면서 도피하고 싶기 마련인데, 주인공들에게는 일종의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브로크백 마운틴이 있다. 이야기의 긴장도 대단하고, 캐릭터도 살아 있다.
수연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와이오밍은 우연이기는 하지만 1998년 매튜 셰퍼드가 동성애자 혐오자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곳이야. 이 영화를 보면서 매튜 셰퍼드를 떠올리지 않기란 힘들지.
사회 한국에서도 흥행할까?
명안 남성들의 러브신 보면서 관객들이 웃느냐 안 웃느냐에 달리지 않았을까.
사회 잭과 에니스가 게이라고 생각하나?
명안 당연하다. 잭은 먼저 알고, 에니스는 나중에 알았다는 차이뿐이다.
수연 에니스는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다. 1990년대 중반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한국의 중년 게이 아저씨 같은 느낌도 있어.
사회 1960년대 미국 시골의 카우보이 이야기가 21세기 서울의 게이들에게도 공감이 가는가? 특히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기호 게이들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안타까움을 겪고 있다. 지하철에 만난 그 아이가 혹시 게이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아무런 시도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게이 사이트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글이 올라온다. “오늘 3호선에서 무슨 색깔 옷 입으신 분, 혹시 이쪽이면 연락주세요” 하는.
사회 지금 한국에도 잭과 에니스 같은 사람이 있을까.
수연 부산만 해도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드는데 게이 커뮤니티의 규모는 심리적으로 100분의 1로 축소돼 있는 것처럼 느꼈어.
기호 지방까지 갈 필요도 없다. 게이 인권단체에서 상담전화를 받아보면 정말 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나 싶은 경우가 많다.
명안 정말 게이한테는 계급보다 지역이 더 중요한 것도 같다.
수연 본질주의적인 발언이라고 비난받을 수는 있겠지만, 게이들은 해변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산을 사랑하는 게이들은 변태야.
사회 잭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는지, 이성애자들에게 맞아서 죽었는지 모호하게 처리된다. 어떻게 생각하나?
명안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한다. 설령 맞아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죽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잭이 왜 그렇게 맞아서 죽어야 하나?
<브로크백>은 과연 흥행할 것인가
사회 어떤 영화보다 <브로크백>에 대한 게이 커뮤니티의 기대가 높다. 이 영화가 한국사회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기호 <브로크백>이 흥행을 한다면 한국에 게이 소비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게이 영화임이 <왕의 남자> <히미코>보다 더 드러나는 영화니까.
명안 솔직히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꾸는 게이들이 많다. <브로크백>은 그 판타지를 건드려주는 영화다. 이성애자 관객은 이성애 순애보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기회가 많은데, 게이 관객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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