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은 이데올로기의 장이다”… 작품 어휘, CD-ROM, 독특한 해설 사전까지 신기한 사전의 세계
최근 국문학자 민충환 교수(부천대)는 소설가 이문구씨의 작품만을 가지고 사전을 냈다. 이 그것이다. 문단의 인간문화재라고 불리는 이문구씨가 펴낸 16권의 소설집, 8권의 산문집, 동시집에 실린 어휘를 하나하나 조사한 것이다. 김유정 어휘사전, 채만식 어휘사전, 을 비롯, 박경리씨의 완간 기념으로 펴낸 에 이르기까지 우리 소설가들의 작품을 항해하는 데 도움되는 나침반이 하나 더 마련된 셈이다.
사전은 곧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
이문구라는 한 작가의 어휘를 추적하는 데에 들인 시간만도 5년이다. 이렇듯 사전은 보통 책과는 달리, 오랜 시간과 끈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종종 사전은 ‘문화의 바로미터’, ‘책을 위한 책’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도대체 사전이란 무엇이기에 문화의 바로미터라고 비유될 수 있을까? 사전 전문 출판사 민중서림의 전창진 편집위원은 사전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광범위한 분야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책이라, 그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를 바로 보여줍니다. 책을 만들 때도 대개 단행본은 두번이나 세번 교정을 보는 데 반해 사전은 일곱번 여덟번 교정을 봅니다. 그래도 또 실수가 나올 수 있는 게 사전입니다.” 사전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사전(辭典)과 사전(事典)을 혼동해서 생각하기 쉽다. 사전(辭典: dictionary)은 낱말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발음·뜻·용법·어원 등을 해설한 책이며, 사전(事典: encyclopedia)은 여러 가지 사항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설명, 해설한 책이다. 그러나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김세연 교수가 저서를 통해, “백과사전 같은 사전도 있고, 사전 같이 만든 백과사전도 많이 출판되고 있어서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듯이, 이 둘 사이의 구별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해방 뒤 우리나라의 첫 백과사전으로는 1958년 학원사에서 펴낸 이 있다. 430명의 필자가 집필한 이 사전은 1973년 20권으로 확장되기까지 우리나라 백과사전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됐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1982년에 발간을 시작해 1984년에 전 30권을 완간한 이 사전은 필자 3천명, 항목 19만여개에, 당시 돈으로 약 200억원을 들인 결과였다. 이후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전 27권으로 펴낸 , 95년 동서문화사에서 펴낸 등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백과사전으로 꼽힌다. 백과사전 편찬이 이처럼 규모가 큰 사업이다보니 세계적으로 백과사전이 있는 나라는 12개국뿐이다. 이중 유명한 백과사전은 영미권의 , , 프랑스의 , 독일의 정도다.
1980년대 들어 사전(辭典)분야에도 한 차례 충격이 있었다. 동녘출판사에서 나온 과 풀빛출판사에서 나온 등 사회과학 사전이 출간되면서, 기존 주류 이데올로기와 성격이 다른 낱말풀이나 개념 정리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전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의 장이다”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CD-ROM과 인터넷의 충격
사전을 통해서 그 사전의 이데올로기를 엿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뜻풀이, 예문, 그리고 단어 선택이다. 어떤 항목, 어떤 올림말을 선택했는가에 따라서 사전을 만든 사람이나 단체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92년 북한에서 간행된 에는 에이즈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는 에이즈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하다, 마지막 단락에 “이 병균은 인류의 대량학살을 위한 침략적 목적 밑에 미국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세계적 범위에서 퍼지고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백과사전의 경우는 더더욱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동서문화사의 고정일 대표는 “한 나라의 백과사전은 필연적으로 자기 나라의 문화를 앞세우게 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백과사전의 경우 일반 가정용 백과사전의 표제어는 5만에서 6만 항목이 적당하고, 지적 생활인에게는 10만 항목 정도가 적당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만물 중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까가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일본 헤이본샤(平凡社)에서 만든 백과사전의 경우는 사무라이나 쇼군 등 일본 문화에 대한 항목이 많이 들어 있고, 브리태니카에서 만든 백과사전은 백작이나 자작 등 영국 문물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런 식으로 사전은 만드는 나라의 이데올로기를 직간접으로 반영하게 된다.
21세기를 맞아 사전은 또 하나의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CD-ROM과 인터넷이 그것이다. 재단법인 한국출판 연구소의 백원근 선임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70∼80년대 고도성장시대에 거실에 마땅히 들여놓을 게 없을 때, 백과사전은 하나쯤 들여놓으면 보기좋은 장식적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집집마다 PC가 많이 보급되어 있는 상태고 부피도 덜 차지하는 등 실용적인 측면에서 CD-ROM 백과사전이 주목받는 추세입니다.” 원래 사전(辭典)을 의미하는 엔사이클로피디어는 그리스어로 ‘학문의 연쇄’를 의미하는 말이다. 링크만 클릭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이트를 이동할 수 있는 인터넷이나, 항목과 항목의 연결이 손쉬운 CD-ROM이야말로 엔사이클로피디어의 원래 뜻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태인지도 모른다.
21세기에 사전업계가 넘어야 할 과제는 하나 더 있다. 인간이 이해하는 사전이 아닌 컴퓨터가 이해하는 사전이 되는 것이다. 컴퓨터가 이해하는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곧 국어정보 분석작업을 말한다. 음성인식 소프트웨어나 번역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 선결돼야 하는 작업이 바로 국어정보 분석작업이다. 이 작업을 위해 문화관광부 국어정책부에서는 각 대학과 연대해 ‘21세기 세종기획’을 만들었다. 2008년까지 10년간 47억원을 들여 ‘컴퓨터를 위한 사전’을 만든다는 기획이다. 일례로 올 5월 출시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오피스10에 추가하기로 한 음성인식 및 음성합성 기능이 한글판에는 빠지게 된다. 우리말을 알아듣고, 문자를 우리말로 바꿔 들려주는 기술이 낙후돼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유병채 문화관광부 사무관은 “선진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작업인데 우리는 80년대 후반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장 이윤이 나는 분야는 아니지만 일단 완성되면 기존 사전이 진화된 효과가 날 것이다”라고 밝힌다.
사전은 그 저서의 성격상 계속 증보되고 고쳐져야 한다. 따라서 사전을 만드는 작업은 대개 10년 단위의 사업이고 , 한 사업이 끝난 다음에도 증보하는 작업은 끊이지 않는다. 어휘와 사물은 변화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연세대학교 사전출판위에서는 2009년까지 20만 단어를 수록하여 현대의 어휘를 총망라하겠다는 사업을 개진중이다. 고려대학교 사전편찬실에서도 올해 안에 한국어사전을 출간할 계획이며, 89년에 낸 을 내년중 보강할 계획이다.
CD-ROM 사전, 인터넷 사전, 컴퓨터용 사전의 대두와 함께, 최근 들어 출판계에는 튀는 사전들의 출현이 눈에 띈다. 방대한 양의 지식을 전부 담으려고 노력하는 사전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으로 자신의 손 닿는 만큼의 범위만 해설하는 사전이다. 일찍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을 통해서 자신의 소설세계를 사전(辭典)이라는 형식을 통해 풀어냈다. , 으로 유명한 베르베르의 소설세계는 땅 아래로는 한없이 작은 개미의 세계, 땅 위로는 한없이 넓은 사후의 세계로 확장된다. 이러한 그의 세계를 용어설명식으로 재풀이한 것이 이다.
세계를 독특하게 해석하는 ‘발랄한 사전’
“내가 보는 세계는 이렇다!”라고 사전이라는 형식을 통해 심술궂게 표현한 책으로는 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화평론가 이명석씨가 을 통해 “고위층 자제:집단 생활과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특수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아예 사전이라는 형식을 빌려 소설을 쓴 경우도 있다. 유고 파비치의 이 그것이다. 이 책은 7세기에서 10세기 무렵 카프카스 지역과 흑해 북부 일대에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제국 카자르에 대한 서술이다. 카자르가 멸망할 무렵, 마지막 군주였던 카간은 민족 정통 종교를 버렸는데 어느 종교로 개종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서로 자기 종교로 개종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점에 착안한 파비치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용으로 각각의 책을 달리 만들었다. 물론 결정적인 구절마다 각 종교의 입장이 십분 반영돼 있다. ‘사전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실을 엄정하게 수록한 것’이라는 선입견을 조롱하는 책이다.
국가적인 지원하에서 몇십년을 내다보고 만드는 사전의 중요성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처럼 상대적으로 발랄한 사전을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리사 터틀의 은 결혼을 이렇게 해설한다. “그것은 성 역할 분담의 기본적인 모델을 형성하므로 가부장제사회의 축소판으로 간주되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처음으로 결혼을 ‘합법적 매춘’으로 명명.” 한편 앰브로스 비어스는 에서 결혼에 대해 이렇게 비꼰다. “주인과 여주인, 두명의 노예로 이루어져 있으나 전체를 합하면 두명인 공동체 상태.”
인터넷 사전에서 발랄한 사전들까지, 다양한 사전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정답으로 삼아야 할까. 일단 한권의 사전을 집어 그 안에 들어 있는 선인의 지적 결정체를 즐겨볼 일이다. 어느덧 세상만사의 해답이 우리 안에 있는 자신만의 사전 속에 뜻풀이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center>우리말 사전의 험난한 여정</center> 우리말 사전 편찬의 역사는 곧 우리말을 먼저 연구한 사람들의 피와 땀이 밴 역사다. 1929년 나라도 없는 상황에서 108명이 발기해 ‘조선어사전 편찬회’를 조직했다. 이때 집행위원은 이윤재, 신명균 등 다섯명이었다. 이 사업은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 현재의 한글학회가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전을 만들려고 하다보니 맞춤법, 표준말, 외래어 표기법 등 가장 기초적인 작업부터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기초작업을 위해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 1936년 표준말 모음, 1940년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해서 발표했다.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어가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관련자들이 함흥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여기서 이윤재, 한징 두명은 옥중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원고까지 잃었는데, 1945년 서울역 운송부 창고에서 원고를 찾아 1947년 의 첫권을 냈다. 그러나 6·25로 인해 작업이 중단됐다가, 1957년 6월30일에 비로소 전 6권의 완간을 보았다. 완간 당시 이름은 (한글학회 지음)이었다. 57년 당시 올림말(수록 어휘) 수는 16만개로, 뒤에 의 전신이다. 물론 이 이전에 1911년부터 주시경, 최남선 등이 라는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고 시도했으나 책으로 발간되지 못했고, 1938년에는 (문세영 지음)이 출판되기도 했다. 이 은 우리나라 사람이 인쇄출판한 국어사전으로 최초의 것이다. 완간 5년 뒤인 1961년, 민중서림에서 이 나온다. 초판 당시 올림말 수가 23만 단어, 92년에 올림말 수가 40만 단어였다. 이 사전은 수록 어휘가 방대했지만 잘 사용하지 않는 지명, 인명 등이 너무 많고, 우리가 전혀 안 쓰던 일본식 한자를 많이 수록한 문제점이 있었다. 예문에도 일본식 용례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1999년 국립 국어연구원에서는 을 발간했는데, 8년간 112억원을 들여 만든 사전이었다. 전문용어 19만개와 북한의 문화어 7만개를 포함해 50만 단어를 수록한 대사전이다. 이 사전 문제점 역시 여러 가지로 지적되어왔는데, 그중 한개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한글학회 편찬위원 조재수씨는 “남북 용어를 통틀어 내느라고 욕심을 부려 1992년에 나온 을 그대로 베껴서 섞어냈다. 사실은 북한 부분은 별책으로 내어야 옳았다. 북한의 사전편찬 추이를 보면 대개 10년에 한번씩 다시 사전을 내고 있다. 1992년에 나온 사전의 올림말을 1999년에 내는 남한사전에 표준으로 다루는 것은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다”라고 지적한다. 북한의 사전편찬사업은 1948년 10월 시작되었다. 북한의 과학원 소속 언어문학연구소 사전 연구실이 편찬한 은 10만 어휘를 수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6·25로 인해 출판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전쟁 뒤 1956년 이 발간되었고, 1960년대의 , 1973년의 , 1981년의 , 1992년의 에 이르기까지 약 10년의 사이를 두고 사전이 편찬되었다. 은 33만 어휘를 수록한 사전으로, 과 마찬가지로 북한 사회과학원의 언어학연구소에서 편찬한 것이다. |
이민아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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