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등에 황홀해하다가 머리 뜯는 솔직한 소녀, 드라마 <궁>의 채경
10대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금기 없이 드러낸 한국 드라마의 새 장면
▣ 권김현영/ 언니네트워크 편집장
드라마 <궁>은 60만 부가 팔리고 소설까지 나오는 등 2차 문화콘텐츠로 점차 확대되고 있는 박소희의 만화 <궁>을 원작으로 한다. 만화 <궁>은 2002년 7월부터 10대 여성들을 주독자층으로 하는 순정만화 잡지 <윙크>에 연재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때문에 윤은혜, 주지훈, 김정훈 주연의 드라마 <궁>에서는 10대 여성 시청자의 존재를 안팎으로 느낄 수 있다. 10대 여성 시청자들의 존재는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윤은혜에 대한 불만과 10대의 성적 욕망에 대한 솔직한 표현, 성적 주체로의 여성에 대한 새로운 표현 방식 등을 통해 다각도로 드러나고 있다.
윤은혜는 안 돼! 안 말랐잖아?!
만화 속 여주인공 채경은 꽃미남을 좋아하고 또래 여자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범한 여자아이로 나온다. 만화 속의 채경은 너무나 예쁘지만 본인도 주변도 그 미모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다. 공주가 될 수 있지만, 공주병에 걸린 것은 아닌 이 상태는 또래 여성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동화될 수 있게 하는 설정인데, 그런 면에서 윤은혜는 꽤 적합한 선택이었다. 사실 몸매 관리 회사의 모델이 될 정도로 늘씬하고, 아이돌 여성 그룹의 멤버로 어울릴 정도로 예쁘지만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 항상 소녀 장사라며 남자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윤은혜만큼 채경에 어울리는 인물도 별로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여주인공 역으로 윤은혜가 발표되자 기존 만화팬들의 저항은 거셌다. 연기자 출신이 아니기에 생기는 불만은 당연하기도 했을 테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만화 속의 채경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마른 체형으로 그려졌는데 윤은혜는 그렇지 않다는 불만이 이어진 점이다.
대부분 순정만화의 주인공 여성들은 엄청나게 마른 몸매의 소유자로 나온다. 섭식장애에 시달리는 여성들 중 40%가 10대라는 통계치가 있을 정도로 마른 몸에 대한 10대 여성들의 욕망은 대단하다. 윤은혜 캐스팅에 대한 10대 여성 시청자들의 불만 중 일부는 윤은혜의 몸에 대한 것이었다. 윤은혜 정도로 괜찮은 몸에 대해 남자 연예인들이 다이어트 운운하면서 놀리는 장면들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10대 여성들에게는 거의 폭력에 가까운 악몽이다. 그러므로 30대 삼순이 정도의 경력과 나이라면 모를까 윤은혜는 친근하고 귀엽기는 하나 여성들에게 동경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성적 대상화의 위협에서 비켜가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꿈꾸는 심리를 반영하기에 10대 여성에게 가장 적절한 몸은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어필하지는 않으나, 뚱뚱한 여자에 대한 인격적인 모독 역시 피해갈 수 있는 ‘아주 마른’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른 몸 말고도 <궁>의 채경에게 가장 큰 매력은 10대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금기 없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우연과 고의가 거듭해 침대를 같이 쓰게 되고, 남자의 몸(특히 등)을 성적 대상으로 응시하는 경험을 한 채경이 다음날 아침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려고 몸을 돌린 신(주지훈)의 등을 황홀하게 보면서 머리를 감싸안고 “나 변태 아냐?”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은 이전의 한국 드라마에서 전혀 볼 수 없던 새로운 장면이었다. 지금까지 영화, 드라마 등 시각적 쾌락을 생산하는 장르에서는 남성의 보는 행위에 권위를 부여해왔다. 보여지는 몸은 여성이고, 남성의 몸이 보여질 때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팔뚝의 근육을 과시하거나 단련된 가슴과 복근을 자랑하는 남성적 힘을 전시하는 방식이었지 여성에게 시각적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 서비스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새 구도, 보는 여성과 보여지는 남성
그러나 최근 영화 <왕의 남자>의 흥행과 꽃미남으로 이뤄진 아이돌 그룹에 대한 10대 여성들의 열광은 보는 여성과 보여지는 남성이라는 구도를 새롭게 인식시킨다. 이들의 인기를 견인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남성 동성애 코드지만, 동성애 코드의 흥행은 우리 사회의 강력한 이성애 제도가 붕괴되는 증거라기보다는 응시하는 주체로서의 여성들의 행위성과 관련돼 있다. 10대 여성들은 자신들의 스타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궁의 남자 주인공인 신과 율(김정훈)의 몸은 채경의 눈에 의해 끊임없이 응시된다. 채경이 “나 변태 아냐?”라고 중얼거리는 것은 자신의 관음증적 쾌락에 대한 고백인 셈이다.
또한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입헌군주제라는 설정은 일각에서 제기됐듯이 입헌군주제인 일본에 대한 선망이었다기보다는 10대의 성적 욕망을 금기한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비아냥에 가깝다. 양가 부모의 동의하에 합법적으로 섹스를 할 수 있는 채경과 신에 대한 동료 여학생과 남학생의 호기심과 부러움은 10대의 성적 욕망을 금기하는 현실에 대한 패러디이기도 하다. 분명하게 존재하나 만화나 인터넷 소설, 팬픽 등의 형태를 통해 수면 아래에 있었던 변화하는 10대의 관객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 <궁>은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물론, 만화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공중파에서 어떻게 걸러질 것인가가 가장 관건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