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남근을 희롱하는 광대놀이

등록 2005-12-23 00:00 수정 2020-05-03 04:24

수컷들의 권력 다툼과 여성성을 발설한 영화 <왕의 남자>
광대와 연산군의 동성애적 긴장보다 더 큰 금기는 ‘신분차’였다

▣ 남다은/ 영화평론가

영화를 보고 난 뒤, 조금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인생은 놀이판. 한번 신나게 놀아보자”는 영화인데, 나는 도대체 영화의 어느 지점에서 마음을 풀고 놀아야 하는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대의 놀이를 다룬 영화치고 이 영화의 에너지는 위태롭게 방방 뛰는 대신, 상당히 다듬어져 있거나 절제된 느낌을 주었다. 그건, 이 영화가 광대극 자체의 극적인 에너지, 현실의 경계들을 밀어내고 오직 광대의 세계만을 전면화하는 어떤 과잉된 에너지에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 속 광대의 놀이는 그 내부로 파고들어 역동적 움직임의 미학을 보여주기보다는 적절한 수위의 스펙터클을 지키며 외부의 상황, 즉 현실세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물론, 광대놀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현실적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세상의 더러운 치부를 설명해주는 데 있다고 한다면, 영화는 그 기능에 ‘올바른’ 방식으로 충실한 듯하다.

처벌과 복수의 피바람이 분다

영화는 크게 세 가지 이야기로 맞물려 있다. 광대들의 삶과 놀이가 한 축, 궁궐 안의 권력과 음모가 다른 한 축, 마지막으로 이 두 축을 연결하는 남성들 사이에 암시되는 동성애적 긴장. 이 세 축 중에서도 영화를 지탱하는 중심적 이야기는 세 번째 축, 남성들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긴장인 듯하다. 말하자면 <왕의 남자>는 관계에 대한 영화이다. 광대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의 관계, 공길과 연산 왕(정진영)의 관계, 왕과 죽은 모친 혹은 선왕과의 관계, 나아가 광대들과 궁궐 안 권력자들 간의 관계 등 관계들의 만남과 엇갈림, 그 표면과 이면이 영화의 이야기를 추동한다. 그런데 이건 중요한 문제다. 관계들의 주체가 남성들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렇다(물론, 영화에서 연산의 첩으로 녹수(강성연)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표독스럽게 연기를 해도, 그녀의 비중은 빛나지 않는다. 그건 녹수와 연산의 관계는 연산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녹수는 관계들의 이야기 언저리만을 맴돈다). 그러니까 광대들의 세계와 궁궐 안의 세계가 만나면서 이루어낸 이 모순된, 이상한 시공간 속에는 수컷들이 득실댄다. 마치 다양한 수컷들의 향연을 보는 것 같다. 이건 <그때 그사람들>의 궁정동 안가에서 수컷들의 싸움과 연민, 의리로 이루어졌던 기이하면서도 현실적인 수컷들의 유사 나라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다.

[%%IMAGE1%%]

그런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수컷들의 향연에 광대놀이가 끼어들면서 일시적일지언정, 권력의 위치 바꿈이 일어날 때이다. 광대놀이와 인형극과 그림자놀이를 통해 수컷들 사이의 위계질서는 일순간 해체되고 고매한 아버지들의 무의식은 느닷없이 드러난다. 한낱 비천한 광대가 장터가 아닌 궁궐 안에서 왕이 되고, 왕은 신하가 되어 광대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남자 광대는 기생이 되고 내시가 된다. 사내들이 여자를 연기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 연기 속에서 사내들의 억압되었던 여성성이 무의식적으로 발휘되어 사내들 사이에 현실과 놀이를 가로지르는 어떤 관계가 암시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찌됐건, 광대놀이가 현실을 풍자하는 순간, 현실과 놀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다툼과 음모는 곧 광대놀이와 다름없어 보이는 지경에 이른다. 그건 궁궐 안 아버지들의 성기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웃음거리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꼿꼿한 남근은 희롱당한다. 그렇게 현실의 감춰진 욕망들, 혹은 현실의 치부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놀이판이 한번 벌어질 때마다, 다시 말해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나의 욕망이 당신에 의해 드러날 때마다 궁궐에서는 처벌과 복수의 피바람이 분다. 금기들을 수면 위로 떠올린 광대놀이는 이제 그 자체로 하나의 금기가 되어 아버지의 질서를 위협한다.

허공에서만 자유로운 운명이여

그리하여 광대놀이는 금기시된 것들이 발설되는 일종의 ‘고백’의 장이다. 이를테면, 놀이의 언어와 몸짓을 통해 남성 인물들은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천민이 하루아침에 왕이 될 수 없듯, 광대가 벼슬아치가 될 수 없듯, 이들의 관계에는 이미 끝이 보인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이 남성들의 관계가 불가능한 지점이 그들이 동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들에게는 신분의 한계, 신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연산이 제아무리 모성 콤플렉스를 짊어진 나약한 인간이라 한들, 그에게는 권력이 있고 장생과 공길이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 한들, 그들에게는 권력 대신 오직 자신의 몸뚱이만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비극은 동성애를 이슈화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코 좁혀지지 않는 권력관계의 모순이 드러나는 데서 시작된다.

살아남은 상처투성이의 광대들이 마지막으로 외줄 위에서 뛰어오를 때, 이 영화를 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허공 위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운명, 광대의 운명. 그들은 인생의 가장 끝에서, 그 위태로운 줄 위에 함께 올라 다시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그 놀이 속에서, 그 허공 위에서 공길과 장생의 관계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영화의 끝에서야 비로소 어떤 세계의 시작이 보였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