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와 남한군인 앞세워 ‘실미도’식 대박 노리는 영화 <태풍>
국가주의 대신 민간인 민족주의 택했지만, 둘의 우정엔 설득력 부족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태풍>은 메가톤급 애국주의 바람을 일으킬까? 순제작비 150억원의 대작 <태풍>이 뚜껑을 열었다. 12월3일 서울 용산 CGV에서 시사회를 한 <태풍>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민족주의와 가족주의의 행복한 결합 혹은 잘못된 만남.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로 이어지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계보에는 국가로 인해 가족에 시련이 닥치지만, 가족은 시련을 이겨나가고 결국은 조국과 화해하게 된다는 공식이 새겨져 있다. 애국주의를 바탕으로 가족주의에 호소하고, 민족의 화해로 마무리되면, 전 국민적 흥행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1천만 명 이상을 동원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그렇게 애국주의 징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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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 북한도, 한국도 못 믿겠다
<태풍>의 애국주의는 순박하다. 지금, 여기서 순박한 한국인의 무의식이 욕망하는 민족주의의 실체를 자기검열 없이 드러낸다. <태풍>의 씬(장동건)은 한반도에 복수를 꿈꾼다.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탓이다. 탈북자였던 씬의 가족은 외교적 이유로 한국행이 거부되고, 인민군에게 넘겨져 학살당했다. 인민군의 총질을 피해 달아난 씬과 누나 최명주(이미연)는 중국의 시골을 전전하면서 살아가다 헤어지게 된다. 동남아를 떠돌며 성장한 씬은 해적 두목이 되고, 핵무기를 손에 넣게 된다. 그리고 태풍의 눈에 핵물질을 실어보내 한반도를 초토화할 복수를 시도한다. 한편 해군사관학교(해사) 출신의 장교 강세종(이정재)은 한국 정부의 지시로 씬의 복수를 저지하기 위해 나선다. 강세종은 씬의 누나를 인질로 씬의 복수를 저지하려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으로 작전을 중단하게 된다. 강세종은 해사 동기들과 자발적인 특공대를 구성해 씬의 복수를 저지하려 나선다.
<태풍>의 민족주의에서 국가는 불신의 대상이다. 중국은 음흉하고, 북한은 무자비하며, 한국은 무능하다. 한국의 무능은 미국의 강압에 굴복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태풍>에서 한국 정부의 비밀 작전은 미국의 압력으로 즉시 중단된다.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는 현대사에서 반복돼온 민족주의의 아픈 낙인을 그렇게 재현한다. 그리하여 대안으로 지금 여기, 민족주의 정서의 핵심인 ‘민간인 민족주의’가 등장한다. 강세종은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유언을 인용해 “조국은 떳떳하지 못해도 군인은 떳떳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세종은 해사 동기들을 모아서 (그것도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해 미혼 동기만 골라서 부른다) 한반도 방위작전에 나선다. 하지만 씬의 누나 명주를 통해 슬픈 가족사를 알게 된 강세종에게 씬은 적이 아니다. 강세종은 “너를 죽이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씬과 세종은 민족의 운명이 갈라놓은 친구에 가깝다. <태풍>은 남한의 애국군인 강세종을 모델로 제시한다. 탈북자인 씬도 남한을 공격하는 듯하지만 결국 조국을 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태풍>의 저변에는 남한 중심의 한민족 대동단결론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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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다른 축은 가족 신파였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비극은 국가의 명령이 가족의 안위를 위협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역설적이게도, 국가의 굴레을 벗어나지 못하는 생존의 조건을 지닌 주인공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위해 싸워야 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비극은 국가의 징집에서 시작되지만, 형제는 징집한 국가를 위한 영웅이 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운명이었다. 그렇게 주인공을 매개로 국가와 가족이 화해할 틈은 만들어졌다. 하지만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한 <태풍>에서는 화해의 틈이 보이지 않는다. 남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탈북자 출신의 씬에게 한반도는 공격해야 할 대상일 뿐 화해의 대상이 아니다. 영화는 씬의 누나를 통해 “그래도 거기에 우리 고향이 있지 않슴메”라고 말하지만 그 말의 울림이 가슴을 때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태풍>은 또 다른 화해의 방식으로 강세종을 내세운다. 강세종과 씬을 애써 ‘친구’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둘 사이의 정서적 교감은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강세종이 씬을 향해 하는 “너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고백이 허공을 맴돈다. 또 <태풍>은 정서를 자극할 카드로 탈북자 남매가 만나는 북과 북의 상봉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 상봉 드라마를 내놓지만, 가족 신파는 삽화처럼 끼어들 뿐 영화 전체에 호소력을 실어주지 못한다.
타이·러시아까지 아우르는 한류의 야망
<태풍>은 민족주의 열풍에 한류의 욕망까지 녹였다. <태풍>의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다. 타이·말레이시아 국경부터 대만 부근을 거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범동아시아가 <태풍>의 무대다. 타이어, 러시아어 대사도 많이 등장한다. <태풍>은 아시아의 태풍이 되고 싶은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이렇듯 메가톤급 욕망을 담은 <태풍>은 12월14일 역대 최대인 514개 스크린을 확보하고, 역대 최대 관객 동원을 향해 출항한다. <태풍>의 흥행지수는 한국의 애국주의를 검증하는 하나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추신. 씬이 “동무 사람 고기 먹어봤슴네?”라는 대사를 한다. 북한의 기아는 9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떠돌던 시기도 당시였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은 이르면 80년대 중·후반, 늦어도 9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그가 너무 일찍 탈북했다. 물론, 이것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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