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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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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없이 보세요, 시청률이 올라요

등록 2005-1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마니아 대신 관성적인 시청자 택한 SBS 드라마의 생존전략
출생의 비밀·재벌 2세 같은 대중 영합 방식으로 10%대 달성하지만…

▣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SBS 드라마 <서동요>에는 세 가지 불가사의가 있다. 하나는 서동(조현재)이란 존재 그 자체다. 서동과 목라수(이창훈)는 사택기루(류진)의 모함에 의해 한번 온 사람은 죽어 나간다는 섬에 유배된다. 게다가 목라수는 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다. 하지만 걱정 마라. 서동님이 계신다. 그는 ‘우연히’ 병사들로부터 그를 섬에 유배시킨 부여선(김영호)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듣고, 부여선에게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테니 자신을 궁으로 불러달라고 한다. 그러자 부여선은 ‘무엇이든 해결하는’ 그의 능력을 믿고 그를 부르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 이를 해결한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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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 불가사의해도 동시간대 1위

서동이 섬에 유배되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다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주다. 그리고 그 다음주부터는 또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서동은 마치 학교 시험문제를 풀듯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거기엔 어떤 고난과 깨달음의 과정도 없다. <서동요>의 작가와 PD가 초인적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노력과 열정, 그리고 올바른 직업윤리의 소중함, 그리고 각각의 캐릭터에 서사적인 분위기까지 더했던 문화방송 <대장금>의 PD와 작가라는 점은 두 번째 불가사의다. 하지만 가장 큰 세 번째 불가사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동요>가 한국방송 <이 죽일 놈의 사랑>과 문화방송 <달콤한 스파이>를 제치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온전히 <서동요>의 승리라고 할 수만은 없다. 시청률 1위라곤 하지만 <서동요>의 시청률은 10% 중반이다. <서동요>의 시청률이 높기보다는 다른 드라마의 시청률이 더 낮기 때문에 1위다.

독특한 스토리와 시청자의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영상이 눈에 띄는 <이 죽일 놈의 사랑>이나 블랙코미디와 멜로, 스파이물을 뒤섞은 장르 실험이 돋보이는 <달콤한 스파이>는 ‘코드가 맞는’ 사람들의 마니아 드라마다. 실제로 인터넷에서는 이 두 드라마의 반응이 훨씬 두드러진다. 공중파 드라마가 ‘국민의 오락’이었던 때에는 젊은 시청자들이 좋든 싫든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젊은 시청자들은 볼 만한 드라마가 없으면 공중파 드라마 대신 인터넷과 케이블 TV를 선택한다. <이 죽일 놈의 사랑>의 팬이라고 꼭 <별순검>을 본다는 보장은 없다. 대신 온게임넷의 스타크래프트 시합 결승을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별순검>은 인터넷의 높은 호응과 달리 시청률 저조를 이유로 조기 종영됐다. 반면 시트콤처럼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빠르게 해결, 모든 걸 쉽고 단순하게 만드는 <서동요>는 ‘어렵고 복잡해서’ 마니아 드라마를 보지 않는 기존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 특히 기성세대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10% 중반 이하로 시청률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 네 번째 미스터리. 그럼 어떻게 SBS는 마니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문화방송을 조용히 이길 수 있었을까. SBS는 문화방송처럼 마니아의 지지도 없었고, 한국방송처럼 <해신>과 <불멸의 이순신> 같은 대하사극부터 <부활> 같은 마니아 드라마에 이르는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방송 3사 중 자체 제작 비율이 가장 떨어질 정도로 제작 환경이 열악하다. 당연히 외주 제작사에 ‘실험’ 같은 걸 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외주 제작사에서도 최대한 ‘대중적’인 드라마를 만든다. <서동요>는 <대장금>처럼 여유로울 수 없고, <다모>의 이재규 PD는 SBS <패션 70s>에서 패션계를 둘러싼 두 여자의 열정 대신 삼각관계와 출생의 비밀을 버무린 스토리로 <다모>의 팬들이 그의 드라마에 절망하게 하는 기현상을 일으켰다. 그러나 <패션 70s>은 <다모>의 두 배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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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변형해봤자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어디 그뿐이랴, <토지>는 원작의 뼈대만 가져왔을 뿐 마치 트렌디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서희(김현주)와 악역 캐릭터 간의 대립을 내세웠고, <그 여름의 태풍> <온리유> <프라하의 연인>은 몽땅 재벌 2세나 출생의 비밀이라는 ‘재래식 무기’를 썼지만 모두 성공했다. 그나마 ‘변형’한 드라마라는 게 가짜 백만장자가 등장하는 <백만장자와 결혼하기>다. 어쨌건 재벌 2세는 나와야 SBS 드라마가 된다. 톱스타까지 출연하면 금상첨화다. <봄날>과 <프라하의 연인> 모두 후반으로 갈수록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고현정과 전도연 등의 출연으로 초반부터 바람몰이에 성공, 어쨌건 30% 가까운 시청률로 종영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하늘이시여>처럼 친어머니가 숨겨진 딸을 배다른 아들과 결혼시킨다는 ‘화끈한’ 설정에 방영분 중 상당 시간을 중년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 소개와 슬랩스틱 코미디로 꾸며 중년 시청자의 구미를 당기기도 한다. <하늘이시여>에서 게이를 비하하건 말건 이 드라마를 보며 웃을 수 있고, 한국방송 <장밋빛 인생>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에게 SBS는 그들이 가장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이들도 마니아라면 마니아고, 그 수는 오히려 젊은 마니아층보다 더 두텁다. 여전히 시청률에 따른 광고수익이 방송사 최고의 수입원이 되는 상황에서, SBS는 까다로운 마니아층, 혹은 점점 드라마에서 멀어지는 젊은 시청자층 대신 여전히 드라마를 ‘그냥 보는’ 장르로 인식하는 시청자들을 끌어들인 셈이다. 그래서 <서동요>도 시청률 15%를 기본으로 하고, <사랑은 기적이 필요해>처럼 캐스팅이 약한 작품도 <장밋빛 인생> 종영 뒤엔 10% 중반대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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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이 ‘마니아의 천국’임을 자랑스레 내세울 수 있는 반면(그래봤자 <별순검>을 조기 종영시키긴 했지만), SBS가 스스로 ‘한국판 펄프픽션의 제국’임을 공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 없이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SBS를 보면 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들은 문화방송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SBS만의 브랜드 이미지를 쌓은 것이다. 물론 이런 SBS의 성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의문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공중파 드라마의 평균 시청률이 이렇게 낮아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공중파 드라마들은 10% 중반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마저 버거워질지 모르고, 이때부터는 다시 마니아 드라마의 가치가 부각될지도 모른다.

항상 실험적일 순 없지만 좀 제대로

지금의 SBS 드라마는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대신 검증됐지만 점점 소멸돼가는 시장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고, <서동요>가 그러하듯 ‘재미’는 있되 올바른 가치에 관한 고민 같은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빠르고 새롭고 실험적인 드라마를 만든다면 옛날부터 드라마를 보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던 사람들은 또 무슨 드라마를 보겠는가. 한발 앞서간 드라마들은 모두 실패하고, 철저하게 대중의 취향에 영합한 올해 SBS 드라마의 성공이 씁쓸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래, 부모님들이 볼 드라마 없이 한숨 쉬는 것보단 SBS 드라마라도 있는 게 낫겠지. 좀 제대로 만들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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