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단계에 이른 플레이어조차 여전히 ‘리니지 월드’에 사는 이유는
영화·소설과 다른 개방적이고 우발적인 1인칭 서사 구조의 매력
▣ 한혜원/ 한남대 문예창작과 강사
게임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월드 사이버 게임즈 2005’(World Cyber Games 2005·이하 WCG)가 11월16일부터 20일까지 닷새간 싱가포르 선텍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예선전을 거쳐 엄선된 67개국 700여 명의 대표선수, 300여 명의 외신 기자단, 500여 명의 게임업체 관계자, 총 43만5천달러의 상금, 인터넷 실시간 생중계, 그리고 5만5천여 명의 관람객. WCG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21세기의 게임이란 50원짜리 동전을 먹던 추억의 오락기에서 엄청나게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WCG 참가국 가운데에서도 한국은 게임 강국으로 인식된다. 특히 PC용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2001년 대회가 생긴 이래 단 한 차례도 금메달을 다른 나라에 내준 적이 없다. 게임 강국으로서 한국의 이미지는 크게 e-스포츠(electronic sports)와 다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인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로 양분된다.
결코 끝나지 않는 우발적 스토리
그런데 e-스포츠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전략 시뮬레이션 <스타크래프트>를 위시해 1인칭 슈팅 게임(First Person Shooting Game)인 <카운터 스트라이크>, 오프라인의 축구를 그대로 재현한 <피파 사커 2005> 등 이번 WCG의 정식 종목은 모두 해외 유명 개발사의 게임들이다. 정작 한국산 게임은 국산 게임 시범종목인 JCE엔터테인먼트의 온라인 농구 게임 <프리스타일>뿐이다. 삼성전자의 자회사인 ICM이 대회를 주관하고, 그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선전했다는 점에서 ‘게임을 좋아하고 잘하는 국가’의 이미지는 드높였는지 몰라도 정작 당장의 실속은 해외 개발사나 유통사에 넘겨준 셈이다.
게임 ‘개발’ 강국으로서 한국의 이미지는 MMORPG 장르에 집중돼 있다. RPG, 즉 역할을 정해 플레이하는 측면보다는 MMO, 즉 수십만 명의 이용자가 동시에 접속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측면이 강화된 한국형 온라인 게임의 개발과 플레이 수준은 세계 최강이라 할 만하다. 세계 최초로 그래픽을 사용한 MMORPG <바람의 나라>에서부터 1998년 이후 롱런하고 있는 <리니지>와 <리니지2>, 초등학생들의 천국 <메이플스토리> <라그나로크> 등 MMORPG는 9~29살 연령대의 한국 게임 사용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게임 장르이다.
MMORPG에서는 수십만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가상 세계에 접속해 역할극을 하듯 자신의 캐릭터를 키우게 된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XBOX) 같은 콘솔용 게임이나 PC용 패키지 게임에서는 게임 디자이너가 설정한 레벨을 다 채우고 나면 더 이상 플레이어가 할 일이 없다. 때문에 게임의 수명이 정해져 있다. 이와 달리 MMORPG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우발적인 스토리를 생성해내기 때문에 게임의 끝이 없다. 컴퓨터 대 인간을 통해 이뤄지는 경험에 비해 인간 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뤄지는 경험은 실재감이 높다. 혹자들이 게임의 세계와 현실 공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게임 안에서만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니지2>에서 이른바 만랩이라고 불리는, 최고 단계에 이른 플레이어들이 수년간 게임에서 이탈하지 않고 플레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결코 끝나지 않는 우발적 스토리 때문이다. ‘리니지 월드’에서 플레이어는 게임 디자이너가 유도하는 스토리를 넘어서, 인간 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실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희로애락과 관혼상제를 단시간에 경험하게 된다. 때문에 리니지 월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현실에서보다 확연한 윤곽을 띠고 있다. 모든 경험은 기쁨과 고통이 마치 어린아이의 정신 속에서 갖는 것 같은 즉각적이고도 절대적인 강도를 띤다. 매 행동과 사건은 언제나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작은 임무 완수에도 의례와 서식 같은 형식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게임은 무엇인가” 서사학자 vs 게임학자
영화나 소설의 경우 독자와 작가의 경계는 엄격하다. 아무리 영화나 소설에 깊이 몰입한다고 해도 독자나 관객이 스토리 전개에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 그러나 MMORPG와 같은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언제나 주인공이 되어서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옆의 전우가 쓰러지는 모습에 복수심을 불태우고, 결국 복수를 완수하고 성을 차지한 뒤 승리감에 도취되어 환호하는 게임의 1인칭적 경험은 분명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감상한 뒤 흘리는 3인칭적 눈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다.
1980년대에 게임의 해악성을 토로하던 비평가들은 이제 슬그머니 방향을 바꿔 게임을 ‘새로운 할리우드’니 ‘서사의 새로운 개척자’라고 평가한다. 더 나아가 게임은 당당하게 ‘학’(學)의 영역으로까지 진출했다. 게임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된다. 북미의 경우, 기존의 영문학과 영화학에 기반을 두고 게임을 전통적인 서사물의 연장선상에서 진화론적으로 이해한다. 조지아대학에서 게임과 뉴미디어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 재닛 머레이가 대표적인 게임 서사학자다. <홀로덱에 선 햄릿>이라는 저서를 통해 게임을 ‘사이버 드라마’로 명명한 바 있는 머레이는 유저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과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경험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본다.
반면 덴마크 코펜하겐 IT대학의 공학도 출신인 곤살로 프란사, 예스페르 율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 학계에서는 ‘게임은 게임이다’(Games are Games)라는 모토 아래 게임을 소설이나 영화의 연장선상에서 논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른바 루돌로지스트(ludologist), 즉 게임학자라고 스스로 명명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게임의 놀이성이다. 그렇다면 자칭 게임 강국 한국에서 학으로서의 게임을 바라보는 입장은 어떠한가. 게임을 즐기는 유저층이 광범위하게 확보돼 있고 기존의 서사학이나 문화 연구자들 사이에서 관심이 증폭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는 게임을 진지하게 본격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다루는 경우가 드물다.
영화가 처음 이야기 예술 장르로 진입하고자 했을 때, 기존의 문학 이론가나 비평가들은 영화를 ‘무지한 기계의 장난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그로부터 불과 40여 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당당하게 21세기 최고의 이야기 예술로 대접받고 있다. 디지털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21세기, 게임이 이야기 예술 장르로의 진입을 꾀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게임은 분명 새로운 서사 양식이다. 소설이나 영화가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는, 선형적이고 폐쇄적인 이야기인 것과 달리 게임은 비선형적이고 개방적이기 때문에 게임 작가의 스토리텔링 못지않게 플레이어의 스토리텔링이 중시된다. 구텐베르크 시대의 영웅은 개인적·역사적 제약과 싸우기 위해 모험을 떠났지만, 게임의 영웅은 오로지 창조된 세계에서 움직이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때문에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서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안나 카레리나나 선택의 기로에서 고뇌하는 햄릿이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게임 은하계에서는 행동형의 해리 포터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해리포터가 사는 21세기형 이야기 예술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담아내는 틀과 유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느 시대에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느 시대에는 이야기를 읽고 봤다면, 우리 시대에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행동할 수 있다. 게임은 서사라는 끝없는 우주에서 새롭게 발견된 은하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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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게임의 진화는 디지털 기술의 결과만이 아니다. 고난도 기술력과 화려한 그래픽만 있다면 ‘미디어 아트’로 대접받을 수는 있어도 게임에 이르지는 못한다. 탄탄한 시나리오가 뒷받침돼야만 게임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비롯해 아케이드 게임, 캐주얼 게임 등은 간단한 설정으로 배경를 파악할 수 있다. 이들이 시놉시스만으로 줄거리를 제공한다면 롤플레잉 게임(RPG)나 액션 게임은 지문과 대사 등이 딸린 시나리오를 통해 게임이 진화를 거듭한다.
국내의 대표적 온라인 게임업체인 엔씨소프트의 게임개발실에서 일하는 시나리오 작가 한재혁씨. 그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 1.5세대쯤에 속한다. 애당초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창세기전> 같은 RPG 세례를 받아 게임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시에는 <스타크래프트>류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대세였다. 그런데 나는 주인공이 되어서 줄거리의 중심에 있을 수 있는 RPG가 맘에 들었다. 누구나 자기의 서사를 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시나리오작가로서 개인 서사의 도우미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당장 전산직을 때려치울 수 없었는데 ‘때마침’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져 고민 없이 게임 시나리오 작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첫 작품으로 2000년에 <에이션트워>라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시나리오를 썼다. 제대로 줄거리가 있는 게임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게임의 기본을 다지려는 심정으로 도전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에이션트워>의 출시는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바뀌는 온라인 축구 게임 <코믹축구>를 통해 게임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했다.
“게임에 줄거리가 개입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 줄거리가 단순해도 게임 속에 다양한 요소를 넣어 게임의 서사를 강화하는 것도 시나리오 작가의 몫이다. 때로는 다양한 줄거리로 플레이어를 유도하기도 한다.” 마치 연작 소설을 읽듯이 줄거리를 선택하는 게임도 있다. 일본식 어드벤처 게임인 ‘사운드 노블’(Sound Novel)은 플레이어가 그림과 텍스트를 보며 게임을 하다 특정 지점에서 대사나 행동을 선택해 40여 개의 결말을 체험할 수 있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적극적으로 게임에 개입하는 셈이다.
그는 2년여의 준비 끝에 <리니지2: 혼돈의 역사>를 내놓았다. 여기엔 5명의 시나리오 작가를 포함해 연인원 120여 명의 제작진이 참여했다. 애당초 신일숙 원작의 만화 <리니지>를 뼈대로 삼은 게임 <리니지>는 2편에서 게임의 시간적 배경을 전편보다 150년 전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은 통치권 이양 시스템이나 신용경제 도입 등의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고 크로니컬 단위의 역사를 새롭게 써냈다. 게임은 게임인 탓에 이들이 내놓은 아이템은 제작 과정에서 명멸을 거듭하기도 한다.
게임의 서사가 시나리오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실제로 아이슬란드 게임사 CCP의 <이브 온라인>의 플레이어는 거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되고, 우주 해적이 되면서 스스로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다. 고급 아이템의 청사진을 만들고 재료를 판매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서사를 키운 게임은 영화와의 경계까지 허물고 있다. 일본 캡콤사의 스토리 게임 <바이오헤저드>는 영화 <레지던트 이블>로 변신했고, 영화 <반지의 제왕>이 게임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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