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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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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가라사대] <하워즈 엔드> 중에서

등록 2005-12-02 00:00 수정 2020-05-03 04:24

그리스와는 달리, 영국에는 진짜 신화가 없어. 그저 마녀들과 요정들뿐이지. <하워즈 엔드> 중에서

▣ 김도훈 <씨네21> 기자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3년 전 영국으로 향하던 나를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우아한 영국인들이 등장하는 머천트-아이보리의 영화들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도 같다. 물론, 영국은 달랐다. 영국은 온갖 피부색의 사람들로 가득 찬, 커리향 가득한 다민족 국가였다. 앵글로색슨 신사는커녕 밤만 되면 술 취한 젊은애들이 길거리에 토해놓은 지뢰를 피해서 걸어다녀야 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신이 났다. 재미있었다. 사람 사는 것 같았다. 2년 만에 만난 영국 친구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았다며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손톱만큼도 비난하고픈 마음이 없다. 2년 전의 나 역시 옥시덴탈리즘으로 가득 찬 바보였으니까. 서양이 동양을 환상화하거나 멸시하는 동안, 동양도 서양을 괴이한 이미지에 가둬놓고 동경하거나 증오한다. 당신이 미국을 증오한다고 말할 때, 그 미국은 무엇인가. 부시의 미국인가, <택시 드라이버>의 미국인가, 아니면 <섹스 앤드 더 시티>의 미국인가. 당신이 프랑스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프랑스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의 프랑스인가, 장 뤼크 고다르의 프랑스인가, 아니면 분노한 무슬림 청년들이 차를 불태우는 프랑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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