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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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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와 위버섹슈얼 사이

등록 2005-11-02 00:00 수정 2020-05-03 04:24

<프라하의 연인> 강력반 형사 최상현이 대통령의 딸에게 구애받는 이유
비루한 신분의 캐릭터를 ‘땜빵’하기 위해 ‘반말’등의 행동양태 빌렸나

▣ 권김현영/ 언니네트워크

결혼 5년차인 친구는 <파리의 연인>에 중독되어 있었던지라, 오랜만에 만나 찾아간 커피숍에서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에 갈래?”라고 하자, 남편이 이 드라마를 무척 싫어한다고 했다. 왜냐고 했더니 이런 드라마 때문에 남자들이 기가 죽는 거라며 투덜거리더란다. 그러나 그 남편이 요즘 <프라하의 연인>을 무척 즐겨본단다. 내세울 거라고는 범인 잡느라고 단련된 몸과 진실한 마음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대통령의 딸을 사로잡는다는 형사인 남자 주인공의 설정이 평범한 남성들의 시선을 잡아끈 모양이다. 여성 시청자의 경우에는 박신양과 이동건, 김주혁과 김민준처럼 몇 가지 조건을 달리한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들을 전시해놓고 그중에서 누가 더 매력적인지를 보고 즐길 수 있는 점이 두 드라마의 매력일 터이다. 최근 <프라하의 연인>에서 김주혁이 분한 강력반 형사 최상현의 캐릭터는 ‘위버섹슈얼’(über sexual)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남성성으로 부각시켰다는 보도까지 잇따르고 있다. 따뜻하면서도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강인한 남성 캐릭터에 여성 시청자들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파리의 연인>에 비해 흡입력 떨어져

하지만 <프라하의 연인>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파리의 연인>에 비해 흡입력이 떨어진다. 한기주는 그가 재벌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연인인 상대에게는 자신을 맞추려 하고, 연애를 방해하는 아버지와는 당당히 맞섰던 점이 매력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권력을 승계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은 존재이자, 결국은 원하는 대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결정적인(self-determination) 캐릭터였던 것이다. 이에 맞서는 낭만적인 반항아 윤수혁(이동건)의 매력이 반감됐던 시점은 정확히 아버지의 집에 다시 돌아가던 때였다.

이에 비해 <프라하의 연인>에 나오는 재벌 검사 지영우(김민준)는 사랑하는 사람을 아버지 때문에 잃고 분노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가 아무리 직접 가구를 만들고 멋진 대사와 수려한 용모로 유혹한들, 그가 아버지 때문에 울분을 삼키는 표정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가 가진 모든 매력은 순식간에 반감된다. 그가 가진 배경이 어떻든, 자신이 필요한 순간에 그 권력을 사용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형사 최상현은 이 중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처럼 보인다. 일단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없이 스스로 길을 개척해온 인물로 그려진다. 여기서 그가 대통령 표창을 받은 형사라는 것이 첫 회부터 강조된다. 지영우와 함께 표창장을 받는 장면은 그에게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아버지에게 공적으로 인정받은 인물로서의 권위를 부여해주고, 재벌 검사와 경쟁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인물이라는 설득력을 가지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경쟁력이 충분하지 않다. 외교관이자 대통령의 딸이라는 신분의 격차 때문에 그의 캐릭터가 혹시라도 비루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지 작가는 그에게 ‘반말’과 ‘소유욕’이라는 전통적으로 터프하고 무뚝뚝한 남성이 연인 노릇을 할 때 보이는 행동 양태를 빌려온다. 공적으로는 깍듯하게 존대말을 써야 하는 검사와 대면하는 순간에도 그는 사적으로 승리한 사랑의 경쟁자로서의 태도를 잃지 않으며, 필요할 때는 반말을 사용하고, “윤재희는 지금부터 강력3반 소속 최상현 소속입니다”라며 공적 언어로 자신의 연인을 소유물로 취급하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이런 태도는 공격적·폭력적으로 보이기보다는 원하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싸움을 피하지 않는 남성다움으로 재현된다. 한기주가 유행시킨 ‘애기야’ 역시 비슷한 맥락의 언어이나 그가 휠씬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상대와의 싸움에서 언제나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의 매력은 권력이 된다

그러나 최상현은 결코 우위에 있지 않다. 그의 위치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그렇기에 그는 구애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구애를 받는 인물로 그려지며 상대에게 잘 보이거나 맞추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윤재희는 비슷한 신분의 지영우에게는 반말을 하지만, 최상현한테는 그러지 않는다. 지영우와는 계급 차에 대한 긴장이 없지만, 최상현과는 성별과 계급 사이의 긴장이 있다는 증거다. 그의 ‘높은’ 신분은 매력적이되 위협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그려지는 반면, 남자 주인공들은 매력이 곧 권력이거나 남성 권력을 드러냄으로써 매력을 유지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강 공주를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거나, 능력 있는 여자를 만나 팔자를 고쳐보려는 셔터맨의 욕망을 가지지 않은 인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여성을 보호해줄 수 있는 남성우월적인 위치를 고집하는 마초가 된다. 차라리 제대로 된 위버섹슈얼을 보여주는 이는 대통령으로 분한 이정길이다. 김주혁의 캐릭터가 그나마 사랑스러운 건 위버섹슈얼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의사소통 능력을 보여주는 유머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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