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하세요.” <친절한 금자씨> 중
▣ 김도훈/ <씨네21>
음침한 호러 영화광이었던 10대 초반의 나는, ‘임산부 관람불가’ 옆에 붙어 있는 ‘스페인 시체스 공포영화제 그랑프리!’라는 문구의 신봉자였다. 시체스가 ‘시체s’(=시체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좀 실망했지만, 이름도 복잡한 영화제의 그랑프리라니 분명히 뭔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랬다. 80년대의 한국은 국제 감각이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변방의 촌나라였다. 사람들은 시체스니, 판타스포르테니, 어려운 이름을 가진 영화제의 수상작이라면 어쨌거나 굉장한 작품일 거라 여겼다.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접어들자 시체스는 사라졌다. 한국 관객들은 현명해졌고, 국제적이고, 예전처럼 권위에 약하지 않다. 시체스의 권위가 부천의 권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영애가 시체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인터넷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나의 암울한 10대로 되돌아간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이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받게 됨으로써 세계적인 배우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국 작품들이 대거 초청을 받아 세계 시장에서 높아진 한국 영화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이 뚝배기처럼 변치 않는 개발도상적 수출역군풍 새마을운동형 자긍심이라니. 그러고 보니 80년대 신문 언저리에서 ‘한국 쌀이 대거 수출돼 세계 시장에서 높아진 한국 농업의 위상을 보여주었다’라는 기사를 본 듯도 하다. 너나 잘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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