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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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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서재에서 삼매경에 빠지다

등록 2005-10-21 00:00 수정 2020-05-03 04:24

컨버전스 흐름 타고 400여만 독서가들을 다시 사로잡고 있는 전자책들…소리나는 어학교재·플래쉬 동화책같은 단순 구현 넘어 선진 출판 주인공으로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만일 청소년이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PSP)을 장만하겠다고 생떼를 부릴 때, 게임 중독만 걱정한다면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세대로 몰릴 수 있다. 게임이나 음악, 영화 같은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강조하던 디지털 기기가 교육, 문화 등의 콘텐츠로 교양인의 욕구를 채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 초 스튜디오나인은 PSP용 어학 타이틀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1004분 분량의 동영상 강의와 실전 문제, 받아쓰기, 어휘 등을 PSP에 담아 ‘휴대용 게임기’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도록 한다. 물론 PSP 이용자들은 ‘전자책’(e-book)으로 다양한 장르문학과 베스트셀러를 읽을 수도 있다.

순수출판시장 점유율 7% 육박

애당초 전자책은 이동성과 저장성을 무기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종의 하드웨어 구실을 하는 전자책 전용 단말기에 많은 소프트웨어(책)를 내려받아 읽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말기는 시장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격이 수십만원에 이르고 휴대하기 불편한 크기와 무게, 배터리 방전의 문제 등이 제기된 탓이었다. 다양한 멀티미디어 요소를 가미한 텍스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도 살리기 어려웠다. 텍스트와 멀티미디어의 통합이 어느 한쪽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존폐론에 휩싸여 있던 전자책이 컨버전스 흐름을 타고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실제로 전자책은 모바일 환경에서 놀라운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인터넷 사용자와 휴대전화, 개인휴대단말기(PDA)가 일상용품으로 자리잡으면서 전자책을 읽는 사람이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자책컨소시엄(EBK)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2000년 30억원에 지나지 않던 국내 전자책 시장 규모가 지난해 300억원에서 올해 500억원대로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따라 참고서를 제외한 순수 출판시장에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내년에 7%대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전자책 발행 수도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올해 말까지 22만6천권이 전자책으로 나오고, 내년에는 34만1천권으로 급증할 예정이다.

저렴한 가격 인기… 실용서 ·장르소설 주축

이달 초 홍익대 앞에서 열린 ‘제1회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전자책은 책을 고르는 재미에 빠지려는 관람객의 발길을 붙들었다. 국내 120여개 출판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설립한 북토피아(www.booktopia.com)에서 전자책 맛보기 서비스를 공짜로 제공한 것이다. 이날 북토피아 부스에 들어간 관람객은 북토피아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푸른숲) 20여권의 책 가운데 한권씩을 휴대전화의 ‘모바일 내서재’에 장서로 꽂으며 전자책 상품권을 덤으로 챙길 수 있었다. 버스나 지하철 등지에서 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던 사람들이 ‘독서 삼매경’에 빠질 기회를 얻은 셈이다.

현재 북토피아는 5만여권의 전자책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을 본문 쪽수로 따지면 1300만 페이지를 서비스하고 있는 셈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9월부터 포털 사이트 ‘네이버’를 통해 본문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책을 뒤적이는 아날로그적 즐거움을 디지털로 구현한 것으로 키워드 하나를 입력하면 관련된 여러 책이 검색돼 문장을 비교하면서 책을 고를 수 있다. 북토피아 김범수 마케팅팀장은 “전자책이 다양한 부가 서비스를 통해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도서 본문 검색을 기반으로 매출액이 급증하는 추세다. 앞으로도 다양한 전자책 서비스 환경을 조성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머지않아 전자책 기술은 유비쿼터스(Ubiquitous)를 기반으로 서비스될 예정이다. 디지털 미디어가 끝없는 개인화를 유발한다는 점을 반영해 전자책 서비스를 공간의 장벽이 사라지는 유비쿼터스 환경에 걸맞게 제공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예컨대 웹이나 모바일 등에서 구매한 전자책을 유선과 모바일로 통합 관리하면서 컴퓨터나 PDA, 휴대전화 등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이나 사무실 같은 컴퓨터 이용 장소에서는 일반 전자책으로 읽다가 이동 중에는 휴대전화나 PDA로 책을 이어서 읽을 수 있다. 전자책을 들고 다니면서 열람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금 음악이나 동영상 등 멀티미디어 환경을 갖춘 전자책이 관련 독자층을 공략하기도 한다. 어학교재의 경우 종이책을 구매할 때 제공하는 음원을 MP3 파일로 만들어 전자책을 읽으면서 회화 내용을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멀티 동화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달님 안녕>(한림), <똥벼락>(사계절), <열두 띠 동물 까꿍놀이>(보림) 등은 동화책에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곁들인 전자책으로 변신했다. 국내의 대표적 시인 10명이 직접 시를 낭송하는 <지친 영혼을 울리는 사랑의 노래>(창작과비평사)는 시인들의 사진에 플래시 효과를 넣어 독자들이 시인을 만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전자책의 진화가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으면서 시장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북토피아가 전자책 선도기업으로 시장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한 가운데 바로북(www.barobook.com)이 무협 소설로, 이북21닷컴(www.ebook21.com)이 순수와 로맨스 소설로 특장을 살려나가고 있다. 여기에 고이북(www.goebook.co.kr), 신영미디어(www.sybook.co.kr), 양파북(www.yangpabook), 엔조이이북(www.enjoyebook) 등도 특화된 콘텐츠로 전자책 마니아를 공략하고 있다. 이들은 일반 도서관의 전자책 도서관 구축을 통해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북토피아의 경우 전자책 도서관 구축으로 인한 매출이 전체의 65%를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전자책이 경쟁력을 갖추는 데는 저렴한 가격도 한몫한다. 대체로 전자책은 종이책의 40% 안팎에 판매된다.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위즈덤 하우스>는 59% 할인된 가격(3800원)으로 상반기에만 5만건 이상 다운로드됐다. 요즘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푸른숲)가 다운로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전자책 베스트셀러는 종이책과 비슷한 흐름을 유지한다. 이와 달리 먼저 전자책으로 선보인 뒤 인기 콘텐츠로 자리잡아 오프라인에서 출판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런 작품으로는 <나는 사진이다>(다빈치), <그림자의 사랑>(청어람), <이태리 연가>(이가서), <그대, 나만의 온전한 사람>(북박스)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전자책 독서인구는 4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출판사들이 전자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종이책에만 매달렸다가는 시장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일 법도 하다. 하지만 실용서나 장르소설처럼 디지털에서 통하는 콘텐츠가 아니라면 다운로드 기회를 잡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전자책 인기 콘텐츠들은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종이책을 디지털 공간으로 이동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에서 전자책이 양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도 질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전자책 특성 살린 미술전집 어떨까

사실 전자책은 인쇄비가 들어가지 않는 만큼 출판문화를 풍요롭게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 얼마든지 앞선 전자책 ‘기술’을 활용해 출판문화의 선진화에 기여할 수 있다. 텍스트와 음성, 동영상이 결합된 멀티미디어북으로 발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기존 출판사들이 엄두를 내지 못한 대형 미술전집이나 번역서 등을 전자책으로나마 선보이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 읽는 환경을 다변화하는 전자책이 출판의 지평을 넓히면서 책의 품질 향상까지 꾀해볼 만하다. 이제 수익모델을 다져가는 전자책 전문기업들이 출판문화 선진화라는 화두를 짊어지길 바라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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