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드라마의 관습을 모아 시청률 정상에 오른 <장밋빛 인생>의 매력
부부싸움 잦아들고 자매 갈등 제거되면서 통속성 대신 진정성이 밀려들다니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휴우~. 아직도 이런 일들이! 아직도 이런 드라마가! 처음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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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 여행을 다녀오자 <장밋빛 인생>(한국방송 2TV 수·목 밤 9시55분) 때문에 난리였다. 아줌마들이 장난 아니게 열광한단다. 방영 두어주 만에 시청률 정상을 넘보고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맹순이는 금순이를 제치고 시청률 정상을 차지했다). 도대체 어떻기에? <장밋빛 인생> ‘다시 보기’를 했다. <장밋빛 인생>에는 보랏빛 향기도, 장밋빛 미래도 없었다. 솔직히 지루했다. 억척스러운 아내, 바람 피우는 남편, 얄미운 시댁식구, 속 터지는 친정식구, 불륜 드라마의 관습은 모두 모았다. 맹순이(최진실)는 아줌마 주인공들에게 닥쳤던 시련을 모듬으로 겪고 있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도 뻔뻔하게 이혼을 강요하고, 시댁식구는 염치없이 구박하고 야박하게 남편 편을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맹순이는 덜컥 암까지 걸려버렸다. 마치 “이래도 맹순이가 불쌍하지 않냐? 이래도 안 볼래?”라고 협박하는 듯했다. <장밋빛 인생>에는 정말 이런 사람들이 많나? 너무 자극적인 것 아냐? 이런 멈칫거림이 보이지 않았다. 부부에 대한 새로운 시선도, 가족에 대한 변화된 성찰도 엿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이런 드라마가 이토록 인기라니! 이건 너무 쉬운 장사 아냐?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그렇다. <장밋빛 인생>에 새로움도 있다. 무엇보다 속전속결이다. 남편의 불륜과 이혼의 위기, 아내의 암 선고가 10회 안에 모두 등장했다. 전개가 화끈한 만큼 시청률도 올라갔다. 솔직히 7~8회가 지나고, 괜히 걱정스러워졌다. 이제 <장밋빛 인생>에 어떤 자극이 남았지? 남은 것은 맹순이의 남편 반성문(손현주)이 반성문을 쓰는 일뿐. 하지만 화해의 드라마가 싸우는 이야기만큼 재미있을까? 드라마 초반의 극약 처방은 드라마 후반의 쥐약이 되지 않을까? 기대 반, 의심 반. 뭐 그랬다.
최진실의 씩씩한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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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여지 없이, <장밋빛 인생>의 성공 비결은 ‘최진실’이다. 최진실의 아우라가 없었다면, 맹순이의 서러움이 그토록 절절하게 다가왔을까? 최진실은 예쁜 옷을 벗어던졌을 뿐 아니라 예쁜 척을, 부끄러운 척을 벗어던졌다. 연기도 압권이다. 표정은 악에 받친 듯, 대사는 뭉개면서, 완벽한 맹순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솔직히 최진실의 연기는 잘하는 연기를 잘 흉내내는 듯한 연기, 아무리 잘해도 70점 만점인 연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진실의 맹순이는 안간힘을 다해 한계를 넘어선다. 대사도 순간순간 빛난다. 맹순이가 이혼을 거부하는 이유가 아이들 때문인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 맹순이의 숨겨진 진심을 슬쩍 내보인다. “사람 마음이 간사해. 그 인간한테 여자가 생겼다니까 그 인간이 멋있어 보이는 거야. 그 인간이 미워 죽겠는데 미워지지가 않는 거야.” 그리고 반성문은 맹순이가 잠자리에서 슬쩍 다가오자 “우리는 가족이잖아. 가족끼리는 이러는 거 아냐”라고 촌철살인의 대사를 날린다. 지나치게 심각해지지 않는 것도 또 다른 인기 비결이다. 지금껏 불행한 이야기가 계속됐지만, <장밋빛 인생>에는 낙관의 빛이 흐른다. 그 장밋빛의 절반은 외로워도 슬퍼도 가족을 챙기는 맹순이의 씩씩한 캐릭터에서, 나머지 절반은 처절하게 슬픈 순간에도 가벼운 반전을 꾀하는 연출에서 나온다.
<장밋빛 인생>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아니 <장밋빛 인생>에서 남녀의 애정은 불륜의 동의어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맹순이의 남편 반성문, 사랑에 끝까지 집착하는 맹영이의 애인 이정도(장동직),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간 맹순이의 어머니는 모두 가정을 버리거나 아내를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그들의 애정행각은 우스꽝스럽고, 그들의 말로는 비참하다. <장밋빛 인생>은 언니 맹순이와 동생 맹영이의 자매 드라마이기도 하다. 언니는 남편의 불륜에 울고, 동생의 애인은 유부남이다. 그리하여 언니는 동생의 반면교사가 된다. 동생은 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 불륜에서 벗어난다. <장밋빛 인생>은 오직 가정 안의 사랑만이 행복하다고 복음을 전한다.
맹순이의 리얼리티, 누가 부정하랴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부부싸움이 잦아들고 자매의 갈등이 제거되면서, 갑자기 드라마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과연 화해의 드라마가 감동의 드라마가 될 수 있을까? 당초의 기대 반, 의심 반에서 기대는 무너졌고, 의심은 사라졌다. 통속성의 지루함은 사라지고, 진정성이 밀려들었다. 맹순이가 영이에게 암 선고를 알리는 부분에서는 코끝이 찡해졌다. 영이가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다리를 구르면서 “우리 언니 불쌍해서 어떡해”라고 울먹일 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장밋빛 인생>이 은근히 남자들의 야망을 수긍하고(영이는 자신을 버린 유부남 이정도에 대해 “누구라도 (이정도 부인의) 조건을 뿌리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용서는 할 수 없어도 이해는 한다”고 말한다), 모성애를 벗어난 여성성을 비난한다 해도(맹순이는 도망간 엄마에 대해 “얼마나 독했으면 우리 셋을 버리고 갔을까”라며 “내가 엄마가 되니까 더 이해가 안 되더라”고 말한다), 맹순이의 리얼리티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통속적인 결론으로 마감한다. <장밋빛 인생>이 아니라 <장밋빛 인생>에 몰입하게 만드는 현실이 문제다. 아직도 맹순이의 슬픔은 도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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