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소녀들을 또 다시 무장해제시키는 드라마 <해변으로 가요>
풋풋한 대사들의 재미가 이복형제 나오는 닭살의 로맨스 설정마저 눌러버려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이 사람 나이를 정말 모르겠다. 이미연은 LG카드 광고에서 16살 가나초콜릿 광고 때의 긴 생머리 그대로 나온다. 웃음 가득 머금은 미소가 잃은 건 부끄러움뿐, 세월은 그의 외모의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이게 광고라는 건가. 얘들 나이도 정말 모르겠다. <해변으로 가요>(한국방송, 토·일 밤 9시45분, 이승렬 연출, 조윤영·문희정 극본)에 나오는 장태현(전진 분)은 한피아 리조트 호텔 사장이라고 하고, 그의 소꿉친구 민주희(강정화 분)는 기획실장이란다.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니 사장은 29살, 기획실장은 26살이라는, 설정이다. 실제 나이보다도, 그리고 그간 전진이 오락 프로그램 등에서 선보인 ‘폭발하던 젊음’에 비하면 좀 많다. 이게 뭐 이상한가. 텔레비전에는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즐비하고 그들은 거기에 완벽한 외모와 성격을 갖추고 있다. 거기에 딴죽을 걸면 당신은 ‘시청자 자격 박탈’이다. 어색하지만 일단 깜빡 속아주고 하는 양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수밖에 없다.
훅, 어퍼컷, 윤소라와 장태풍의 티격태격
그러고 나면 이 드라마의 재미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단지 대강 취한 ‘배역’에 따라 멋있는 몸을 내세우며 대충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재미없을까? 어릴 적 나는 엄마, 너는 아빠, 일찍 들어오세요, 그래 오늘 김치찌개는 왜 이렇게 짜, 하면서 놀 때, 그게 재미없었나. 아주 재밌었다. 종이 인형을 오려서 옷을 갈아입히고 파티에 가고 이웃집 사람을 불러 초대하고 아무런 내용 없이 “호호호”거릴 때, 그게 재미없었나. 아주 재밌었다.
<해변으로 가요>는 소녀들의 가장 꿈에 가까운 형태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청아(윤소라 역)가 있다. 이청아는 <늑대의 유혹>에서 당대 가장 많은 여학생들이 우러러보았던 강동원과 조한선의 사랑을 한꺼번에 받았지만 시샘 어린 눈길을 받지는 않았다. <해변으로 가요>에서도 이청아는 전진과 이완(장태풍 역)의 사랑을 한꺼번에 받는다. 이청아는 평범하고 예쁜 척하지 않고 실수투성이인 여학생, 자신들이 하는 대사를 소화해낸다. 여학생들은 쏘욱 이청아에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귀여니의 얼토당토않은 상황 설정, 아버지가 에이즈로 죽어서 신체 접촉에 극도로 과민한 반응을 하는 남학생(<그놈은 멋있었다>), 알고 보니 어릴 적 헤어진 남동생(<늑대의 유혹>)은 어디서 많이 들어서 닳고 닳은, 혹은 고등학교에서 유언비어로 떠도는 로맨스 상황이지만, 그 상황의 한가운데는 아무런 준비 없이 소용돌이에 휘감기는 아주 평범한 여학생이 있다. <해변으로 가요>는 리조트의 상속을 둘러싼 욕망과 배다른 형제의 갈등과 작은 모텔을 집어삼키려는 거대 자본의 음모가 있지만, 그 가운데는 아무 가진 것 없이 무지 성실하기만 한 소녀가 있다. 여학생은 현실일 것, 하지만 상황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을 것. 조금도 현실을 닮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현명하다. 소녀는 22살이라지만 소녀다. 중학생이고, 고등학생이다.
이 ‘유치한 가상현실’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대사다. 여기에 소녀들의 심정이 담겨 있다. 스토리에 닭살이 돋더라도 (꾹 참고) 그들의 대사에 주목해보라. 무엇보다 윤소라와 장태풍의 티격태격을 보라. 한명이 스트레이트 훅을 날리면 맞받아치는 쪽이 억울해하고 다시 억울한 얼굴을 숨기고 어퍼컷을 날린다. 심각한 순간과 골 지르는 순간을 넘나든다. 심각한 순간에서 갑자기 로맨틱한 순간으로 건너뛰었다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서로 도와 사람을 구하고 나서 슬슬 조금은 상대가 대견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배고플 텐데 우리 집에서 비빔밥 먹고 가라”고 하면 다른 쪽은 “왜 그러셔” 하며 주춤 한발 뒤로 물러선다. 다시 이 화기애애함을 먼저 말한 사람이 이어나가면 안 된다. “집에 남은 반찬 싹 없애버리려고 그런다”로 마무리되는 건 당연. 이런 쳇바퀴 구르는 상황을 위해서 이들은 만날 일 없는 약속을 하고, 줄 수 없는 선물을 준비하고, 보답받지 못할 눈물을 흘린다. “상관없으신 분은 빠지시고” “너라는 인간 도저히 용서가 안 돼” “됐거덩” “갈 때 가더라도 씹을 거라도 내놓고 가지”라며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을 수시로 하고, 칭찬은 “어쭈, 좀 하네”다.
소녀들은 키스와 후계자를 꿈꾼다
이야기의 맥락과는 전혀 맞지 않는 대화도 <해변으로 가요>의 재미다. 이청아가 해변수비대로 발령날 때 다른 애들은 “우리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사람들인데 걔는 자격이 되느냐, 그렇게 특채가 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반응하는데, 뒤쪽에 수군거리는 태풍과 친구는 “쟤가 여기 오면 우리 밥은 누가 해주냐”다. 이것 역시 귀여니가 인기를 끄는 이유와 비슷하다. “인어공주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지만 원망하지 않고 그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어. 결국 인어공주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하고 심각하게 물으면 상대방은 “사과 먹고 죽지 않냐”라고 말하고,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인어공주 알아?” “응 알아. 어릴 때 비디오로 봤어”라는 대화 뒤에 “인어공주가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래”라고 말하는 식이다. 아버지가 에이즈로 죽었다라는 사실을 말하는 장면이 나오고 슬쩍 눈물까지 비치는데 결국 여자애는 “넌 내가 지금 허리만 안 다쳤어두 뒤통수 한대 맞았다”라고 말한다(<그놈은 멋있었다>). 심각한 상황에 절대 말려들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막말을 해댄다.
이렇게 대사로 쌓아간 현실은 결론에서 비현실적이던 상황 중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상황을 취하면서 끝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맨스 영화, 소설, 드라마의 결론대로 소녀는 상처 입고 울고 싶어도 웃다가 누군가와 키스해야 한다(키스하는 결론도 없다면 왜 중학생, 고등학생 대사를 하는 애를 22살이나 먹은 걸로 설정했겠는가). <해변으로 가요>에서는 ‘운명의 상대’니 ‘종소리 들렸던’ 남자 대신에 그 주인공은 장태풍이 될 것이다. 그것도 장태풍은 상황을 겪으면서 ‘성장’하게 될 테니 더할 나위 없다. 싫증 많고 사고투성이 태풍은 창조적 발상으로 아버지의 후계자로 지목될 터다. 현실의 인물이 비현실의 인물로 격상하고 덩달아 현실의 소녀 역시 비현실로 격상한다. 이것이 소녀들이 소구하는 방식이다. 현실에서 발견하는 것에 뜻밖의 행운이 있을 것이니. 이 결론은 현실의 소녀들에게 언제나 지치지 않는 ‘미래형’의 꿈을 안겨준다. 그런데 당신이 소녀가 아니라면, 장르의 법칙의 진동에 그냥 몸을 맡겨라. 니들 재밌게 노는구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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