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민요 12잡가 예능보유자 통합 심사 움직임 둘러싼 논란
전수조교 임기제·인원확대 등 통해 실력 위주 후보 선정 꾀해야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올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지정 30주년을 맞는 이은주(84) 명창. 뭔가 기념할 만한 무대를 마련할 수도 있으련만 일체의 행사를 준비하지 않고 있다. 대신 소리인생 60년을 맞는 내년에 경기민요의 진수를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이 명창은 경기민요 1세대의 예능보유자 가운데 유일한 ‘현역’으로 활동하며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권농동 주택가에 있는 한옥이 소리 교육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직은 가르칠 기력이 있는 것을 다행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의 맥을 이어갈 ‘후학’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은 게 사실이다.
이은주 명창이 이수자에게 미안한 이유
어쩌면 차기 보유자에 대한 염려는 행복한 고민인지도 모른다. 이은주 명창이 소리교육장으로 쓰는 안방에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50여명의 사진이 들어 있는 이수자 자격증이 빼곡히 걸려 있다. 그만큼 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경기민요의 커다란 산맥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겨우 열여섯 나이로 소리에 입문해 경기·서도 민요의 큰 봉우리 원경태 선생의 소리를 이어내려 그야말로 일가를 이룬 셈이다. 여기에서 이 명창의 고민이 비롯된다. “누구 하나 모자람이 없는 이수자로 키워왔다. 그런데도 정해진 소수만 차기 보유자 대열에 합류할 수 있어 늦게 소리 세계에 접어든 이수자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있다.”
도대체 중요무형문화재 예기능보유자가 무엇이기에 노스승의 마음이 심란한 것일까. 흔히 ‘인간문화재’라 불리는 예기능보유자는 ‘전통문화 권력’으로 통한다. 현재 108개 종목에 197명의 보유자(명예 보유자 15명, 전수 조교 301명)가 있다. 대부분의 보유자는 전수 조교를 1순위 대상으로 삼아 2~3배수를 차기 보유자로 추천해 전문가의 사전 심사를 거쳐 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 여부를 결정하도록 한다. 문제는 보유자가 되면 전통문화 보전을 통해 명예와 부를 ‘독식’한다는 데 있다. 보유자로 지정되면 매달 지원금(100만원)과 전승활동비(지원금의 절반 수준)을 지원받으며 문하생을 길러내 ‘이수자격증’을 발행할 수도 있다.
사실 이은주 명창이 지난 1975년 7월 고 안비취 명창, 묵계월 명예 보유자 등과 함께 경기민요 예능보유자로 선정될 때에도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때만 해도 경기민요를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기에 독보적인 존재들이 물망에 올랐다. 문화재위원회는 단일 종목인 경기민요를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12잡가를 세 사람에게 4곡씩 나눠서 예능보유자로 뽑았다. 각자의 독특한 창법과 소리제(制)를 인정한 결과였다. 당시 논란은 경기민요의 전설적인 소리꾼으로 회자되는 김옥심 명창이 탈락한 데서 비롯됐다. 옥구슬 굴러가는 듯하다는 ‘방울목’도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의 최고 소리꾼이라 불리던 명창도 탈락의 고배를 마신 보유자 선정 제도는 아직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도가 차츰 뿌리를 내리면서 이수자들이 크게 늘어나 문하생들의 대격돌이 잇따르기도 한다. 심지어 금품로비나 연줄심사 의혹이 제기되면서 기예능보유자 심사과정이 수사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때로는 문화재위원회가 보유자 후보를 뽑으면서 보유자에게 통보하거나 협의하는 절차를 밟지 않아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설령 보유자가 의견을 내더라도 ‘참고자료’ 정도로 쓰이기에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문화재위원들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지적도 있다.
‘소리’보다 로비와 연줄이 판치기도
얼마 전 이은주 명창과 함께 활동한 경기민요 1세대 묵계월 명창이 스스로 보유자에서 물러나 ‘명예 보유자’로 인증을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웠지만 차기 보유자 선정에 자신의 뜻을 밝히려는 의도로 해석됐다. 기존 보유자가 자신의 소리제를 이어갈 사람을 뽑는 데 나서고 싶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묵계월 명창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국 무형문화재과 류춘규 연구관은 “전문가들의 사전회의가 있었는데 보유자가 내세운 후보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경기 12잡가 통합 심사 도입에 대한 토론도 있었는데, 차기 보유자를 서둘러 뽑지 않는 게 전승에 도움이 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귀띔했다.
이에 따르면 경기민요 전승이 단일 보유자 체제로 바뀔 수도 있다. 계보와 계파를 떠나 12잡가를 통합해 1인 경기민요 보유자를 선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의 전문가 회의에 참석한 한 위원은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작용하는 상황에서 보유자 중심의 전승 체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경기민요 관계자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재야 명창을 기리는 김옥심 추모사업회 김문성 회장은 “통합 심사 논의 자체가 부적절하다”며 “경기민요의 전승 방법과 중요성을 간과한 탁상공론적 발상이다. 세 계보는 저마다 다른 색깔의 소리를 통해 나름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고 말했다.
지금 이은주 명창은 보유자 자리에 연연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30여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 모르는 상황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동안 심심찮게 무형문화재 제도가 논란이 됐어도 경기민요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하나의 사건임이 틀림없다. 이 명창은 경기민요가 논란에 휩싸이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 보유자 지정 30여년 동안 한결같이 전승에 매달려온 대가치고는 야속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무형문화재 지정이 없다면 당장 문하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도 웬만큼 전승이 이뤄진다고 보유자를 내지 않거나 축소한다면 머지않아 다시 맥이 끊길 수도 있다.”
이번 사태에 전통 예술인들의 ‘정치’가 한몫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소리꾼으로서 기량을 연마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기보다는 로비나 연줄로 보유자 혹은 전수 조교로 인정받으려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보유자를 실력으로 뽑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절실하다. 이수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난 만큼 전수 조교 수를 2인 이상으로 확대하거나 전수 조교를 2~3년의 임기제로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여럿이 실력으로 경쟁하면서 보유자 후보군에 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전수 조교에 대한 지원비 증가와 형평성 문제를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
흥겨움·경쾌함 살리는 제도 정비를
어차피 경기민요 보유자는 12잡가를 모두 소화해야 한다. 그럼에도 12잡가를 임의대로 4곡씩 나눠 보유자를 선정하는 현행 제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예컨대 묵계월제·이은주제·안비취제 12잡가라는 이름으로 12곡을 모두 전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안비취제는 세대교체가 이뤄져 이춘희 명창이 보유자를 이어받았다. 이렇듯 30여년 동안 경기민요를 저마다의 색깔로 전승한 계보의 특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흥겹고 경쾌한 경기민요의 특색을 12잡가에 그대로 살리고 싶어하는 이 명창, 그 누구도 70년 소리인생을 흔들리게 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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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 주수봉-이진홍, 묵계월, 김옥심
묵계월은 서도 소리꾼들이 주로 사용하는 끌목과 된목을 사용해 12잡가를 부르며 음후미를 들어서 처리한다. 이는 고제 12잡가의 전형적인 목 사용법으로 고졸한 맛이 있으며 다이내믹한 느낌을 준다. 묵계월의 창법은 서도와 경기지방의 목 쓰임새가 모두 나타나기 때문에 변화가 심한 역동적인 창법으로 독특한 장식음을 구사해 고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있으며 음성은 매우 단단하고 꿋꿋하다 .
이은주제 12잡가
계보 원경태-이은주
이은주의 12잡가는 전형적인 경기소리 창법으로 음색이 맑고 화사하며 매우 힘차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끌목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음후미를 부드럽게 굴려서 떨어뜨리는 창법을 사용한다. 묵계월의 창법에 비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반면 완만한 음처리 때문에 다이내믹한 느낌은 덜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맑은 음성을 바탕으로 편안하게 노래하기 때문에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안비취제 12잡가
계보 최정식-안비취, 묵계월
전형적인 경기창법에 하규일로부터 배운 가곡 목 쓰임새를 가미한 안비취의 12잡가는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을 준다. 특히 가곡 발성법에 따른 미분음적 요소가 잡가 전반에 걸쳐 발견된다. 묵계월의 창법에 비해 비교적 편안한 느낌을 주는 반면 가곡목 쓰임새에 따른 음처리 때문에 불안정한 음정처럼 들리는 단점이 있다. 12잡가를 정가풍으로 정아하고 단아하게 부르게 때문에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느낌이 매우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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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명창의 <춘향가>, 청중 추임새 받으며 한옥 현장 제작
얼마 전 판소리 소리꾼 김수연(58) 명창은 오랜 아쉬움을 털어낼 소중한 경험을 했다.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인 <춘향가> 한바탕을 실감나게 녹음한 것이다. 지난 5월 한달 동안 경기도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있는 전통한옥 ‘운당’에서 세 차례에 걸쳐 완창했다. “판소리 야외 녹음은 생각조차 못했기에 걱정을 많이 했다. 스튜디오에서 기계 힘을 빌리면 조금 편하게 녹음을 하는데 괜히 어려운 일을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야외에서 녹음하니까 청중들의 추임새에 힘을 얻어 생동감 있는 소리를 풀어낼 수 있었다.”
오는 8월 중순쯤 김수연 명창의 현장 녹음 <춘향가> 음반이 나온다. (재)국악방송 '국악이 좋아요'팀과 국악음반 전문회사 ‘악당이반’이 공동으로 기획한 이 음반은 판소리의 제멋을 살려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 음반 기획에 참여한 국악방송 ‘새음원 시리즈’ 담당 장수홍 프로듀서는 “국악에 맞는 녹음 방식을 이제야 실현하게 됐다. 스튜디오 녹음은 판소리의 3대 구성요소인 청중을 배제할 수밖에 없다. 연주자는 자연과 호흡하면서 스튜디오보다 훨씬 편안하게 따뜻한 소리를 녹음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때 전통소리 음반작업을 하는 기획사들이 야외 녹음을 시도한 일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원음(퓨어 사운드)을 확보하는 데 한계를 보이면서 대중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각종 효과를 위한 기계장치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이번 음반 작업은 릴테이프에 소리를 녹음하는 아날로그 음향장비인 ‘나그라’(NAGRA)를 이용하는 전문 엔지니어 김영일씨가 참여해 최대한 원음을 살리려고 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소리 채집꾼인 주인공이 사용해 눈에 익숙한 나그라는 변형 없는 소리를 녹음할 때 주로 쓴다.
그동안 판소리의 세계화는 한계를 노출했던 게 사실이다. 아무리 유네스코에서 판소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도 제대로 알리지 못한 때문이다. 김수연 명창만 해도 2년 전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안타까웠던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당시 판소리 다섯 마당이 공식 프로그램에 초청돼 김일구·김영자·조통달 명창 등과 함께 완창에 나섰다. 그런데 서구인의 귀에 익숙하지 않은 판소리의 리듬과 음악 양식은 낯선 충격을 주는 데 그치고 말았다. ‘한국 오페라’라 불리는 완창 판소리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탓이었다.
이번 음반을 기획한 국악방송과 이당음반은 해마다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하나 이상을 현장 녹음할 예정이다. 야외 현장 녹음은 원음 획득에 제약이 많아 연중 녹음이 어렵다. 예컨대 여름에는 곤충의 울음 소리가, 겨울에는 강한 바람 소리가 녹음을 방해하는 식이다. 최적의 시기를 택한 이번 녹음에서는 갑작스런 비행기 소음으로 몇 차례 녹음이 중단되기도 했다. 전통문화를 전승하는 데 사람의 노력뿐만 아니라 자연의 도움까지 필요한 셈이다. 머지않아 음반이 나오면 소리꾼에 신명을 불어넣는 ‘귀명창’이 되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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