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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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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떡해, 산울림 너무 좋아!

등록 2005-06-09 00:00 수정 2020-05-03 04:24

<문 좀 열어줘>로 문을 연 개구쟁이 악동 3형제의 콘서트
한국 대중음악사의 주단 같은 스물여덟곡, 파격적인 아마추어리즘 되새김질

▣ 최지선/ 대중음악 평론가

여름으로 넘어가던 5월28일 오후 서울 장충체육관. 부부와 아이들까지 가세한, 신명나는 ‘음악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대 가까이로 뛰어나가는 열성파 ‘언니’들은 물론, 보통의 공연장에서는 얼굴도 보기 힘든 ‘오빠’들이 ‘닭살 멘트’로 “사랑해요”를 외쳐대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한동안 불었던 ‘7080’ 바람을 두고 중·장년층의 화려한(?) 귀환이라고들 했던가.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풍경이 친숙한 것은….

이날 공연의 제목은 ‘2005 산울림 음악연(音樂演): 29년 동안의 설레임’. 산울림이 길을 나선 지 어느덧 이립(而立)의 나이가 된 것이다. 산울림이 누구이던가. 말 그대로 전설과 신화 그 자체가 아닐까. 1977년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혜성처럼 출현한 산울림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제1회 문화방송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나 어떡해>가 이들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이들의 인기 가도에 불을 지폈다. 3형제 ‘악동’(樂童)들은 13장의 정규 음반을 비롯해 동요 음반들을 발표했다. 김창완과 창훈은 개인 솔로 음반을 내기도 했고, 다른 가수들의 음악에도 손길을 미치기도 했다. 어느샌가 오십줄에 접어들었거나 접어든 이들. 맏형 김창완(기타·보컬)은 중견 연기자이자 방송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두 동생 김창훈(베이스·보컬)과 김창익(드럼)은 각각 미국과 캐나다에서 회사의 중역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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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혜성이 나타났다!

이제 한국 대중음악사의 ‘주단’ 산울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이 자리에서는 접어두고 공연장으로 가보자. 이 공연에서 이들은 13집 이후 8년 만에 해후한 셈인데, 오래 기다린 팬들에게 보답하려는 듯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의 ‘음악놀이’ 동안, 스물여섯곡과 앵콜송 두곡을 빼곡히 포장했다. 여성 키보드 주자와 기타리스트 하세가와(현 ‘뜨거운 감자’의 멤버, ‘곱창전골’의 전 멤버)의 도움을 받으며….

공연은 대략 2부로 구성됐는데, 전반부에는 다소 정적이고 말랑한 노래가, 후반부에는 로킹하고 열광적인 노래가 대동됐다. 공연의 문은 산울림식 스트레이트한 로큰롤 <문 좀 열어줘>와, 사이키델릭한 시정(詩情)이 조우하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열었다. 뒤이어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통해 유명해진 곡), <내게 사랑은 너무 써> 같은 김창완의 대표적인 애상조의 발라드들이, 김창훈이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목소리를 실은 <초야>와 <독백>이 이어졌다. 2부는 ‘개구쟁이 로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머니와 고등어>를 필두로 <산할아버지> <개구장이> 동요 스타일의 곡으로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산울림 음악의 또 한축으로, 김창훈 특유의 걸걸하고 투박한 목소리가 트레이드마크인 <내 마음>(내 마음은 황무지)과 <특급열차(속에서)>도 터져나왔다. 이때 분위기가 고조되며 공연장은 용광로로 돌변했다. 김창훈이 작곡하고 샌드 페블스가 부른,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대명사(영화 <박하사탕>에도 나왔다) <나 어떡해>로 공연을 끝맺기까지 이 열광의 도가니는 식을 줄 몰랐다.

30년, 40년 영원히 노래해주세요~

그렇다면 산울림의 음악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펑크, 사이키델릭, 헤비메탈 등 많은 음악 장르·스타일들이 언급되는데 사실 이러한 장르와의 일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연주력이나 가창력의 문제를 넘어선 아마추어리즘은 풋풋하고 신선하며 파격적이었으므로. 이는 때때로 몽환적인 사이키델릭(혹은 분방한 헤비메탈이나 하드록)과, 때로는 ‘개구장이’의 순수한 동심과, 때로는 서정적이면서도 처연한 소년 소녀적 감수성과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더불어 정밀한 일상어로 채색된 수필, 혹은 시적 상상력의 유희로 꾸며진 노랫말들은 검열 시대의 순탄치 않은 작업 속에서도 오롯이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도 과거지사일 뿐일까. 이들은 이날 공연에서 ‘30년이고 40년이고 영원히 노래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나이 들어서까지 현재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새로운 음악을 지속적으로 만드는 일은 비단 산울림만의 소망은 아닐 것이다. 우리네가 만들어놓은 부실한 역사와 환경 때문에도 이는 아주 어려운 소원이다. 그래서 산울림에게 거는 기대는 더욱 간절한 것이리라.

* 덧붙여: 마지막으로 공연에서 아쉬웠던 점은 다름 아니라 체육관의 음향 시스템이었다. 공연장 사운드는 너무 열악해서 보컬과 연주 사운드 모두를 명징하게 잡아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방에 둘러앉은 관객들을 위해 고안됐을 원형무대 콘셉트는 더더욱 빛을 발할 수 없었다. 기존 공연의 몇배에 달하는 시스템이 투여됐다는 기획사의 설명도 무색할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 산울림이 훌륭한 기자재와 기똥찬 연주력만으로 음악을 했던가. 산울림의 여정을 생각해보면 (안타깝기는 하지만) 다소 뜨악한 연출이나 열악한 공연 시스템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산울림은 산울림이었다.



기타로 ‘명반’을 타자


산울림 대표작 5선, 초기 사이키델릭부터 따스한 노익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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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아니 벌써>: 초기 석장의 음반은 산울림의 역사상 주옥같은 명작들이다. 이 시기는 지글거리는 퍼즈 톤 기타와 무정형의 키보드가 화학작용하는 산울림식 사이키델리아가 주도한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문 좀 열어줘> 같은 산문체(구어체)의 당돌한 파격은 물론, 아름다운 시적 서정과 접속하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기성 주류계와는 딴판이었다.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2집은 오르간의 비중이 더 커졌다. 전주만 2, 3분대인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비롯해, 템포와 리듬이 다채롭게 변화하며 복잡한 구조와 맞물리는 <어느 날 피었네>, 대학가요제의 히트곡 <나 어떡해>가 실렸다. <떠나는 우리 님>의 전통음악적 코드와 접속한 마무리 방식은 일견 1집의 <청자(아리랑)>와 비슷하지만, 블루지한 양식과 타령(민요)조가 더 긴밀히 융해됐다.
3집 <내 마음/ 그대는 이미 나>: 3집에 이르자 더 실험적인 면모에 치중한다. 18분이 넘는 <그대는 이미 나> 한곡으로 LP 뒷면을 채워버린 것만 봐도 상징적이다. 몽환적인 플렌저 이펙트를 건 기타에 섬세한 목소리가 실린 <한 마리 새 되어>와, 거칠고 위악적인 김창훈의 목소리를 통한 거침없는 산울림표 록 <내 마음>(내 마음은 황무지)은 음반의 쌍꼭점일 듯. 음악적 실험이 돋보였다.
7집 <가지 마오/ 하얀 달/ 청춘>(1981): 서라벌레코드에서 대성음반으로 이적한 뒤의 첫 음반이자, 창훈·창익의 제대 뒤 3형제가 협업한 첫 음반. <가지 마오> <그대 창가로 와요> 등 ‘막 달리는’ 로큰롤(혹은 산울림식 헤비메탈?)부터 음울함이 교차하는 <청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실은 <노모>까지, 나름의 깔끔한 정제미로 무장하고 산울림 ‘중기’를 열었다.
13집 <무지개>(1997): 산울림 이름으로는 6년 만, 3형제의 공작(工作)으로는 13년 만의 음반. 그들이 각자의 길을 떠난다고 했을때 ‘다시 돌아올 것이다’란 말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마치 당시 인디 밴드들의 펑크와 교감하는 듯한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와, 팬에 대한 헌사를 바친 <무지개>가 수록돼 있다. 따스한 시선이 담긴 노익장이 느껴지는 음반으로.




다른 가수도 키웠네

김창완은 대성음반에 입사한 뒤 기획과 작사·작곡 및 프로듀서를 겸했는데 그와 직·간접적 연관을 맺으며 음반을 발표한 이들로는 로커스트, 노고지리, 장끼들, 이선희, 하덕규 등에 이른다. <누나야>와 <회상>을 부른 임지훈이나 동물원은 산울림식 고품격 발라드 계보의 후예다. 한편 1980년대 중·후반을 풍미했던 댄스가요 계보에도 동승했다. 이은하(1984)의 음반에도 산울림의 곡들이 사용됐을 뿐 아니라 김완선의 1·2집(1986·87)의 작곡자는 김창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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