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소리없이 자랐네, 노래운동의 새싹

등록 2005-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노래마라톤 ‘여섯줄의 삶과…’로 짚어본 민중가요의 오늘… 인터넷·모바일 등 새 활로 찾는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마치 주황색 작업복의 환경미화원들이 아프리카 원주민의 악기를 연구하는 듯한 ‘재활용상상놀이단’. 서울시 청소년직업학교 하자센터의 교사와 학생들이 뜻을 모아 만든 재활용상상놀이단은 악기를 만드는 노동과 생활에 활력이 되는 음악의 ‘합일’을 꿈꾸고 있다. 여기에서 20여명의 단원들과 함께하는 예술감독 안석희씨는 땀방울을 통해 새로운 활기를 얻으려고 한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삶의 노래 예울림’, 전문 노동가요 집단 ‘꽃다지’ 등에서 ‘유인혁’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사람이 태어나>를 비롯해 <노래만큼 좋은 세상> <바위처럼> 등 귀에 익숙한 노래를 만든 민중가요 창작자다.

여성·생명에 귀 기울이는 새 실험들

오랫동안 민중가요 현장을 지켜온 안석희씨가 전혀 다른 ‘창작’에 다가선 것을 의외로 받아들인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지난해 3월 재활용상상놀이단을 창단하기 몇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포장마차에서 마시는 한잔 술 같은 노래를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도록 한다며 동료와 함께 ‘유정고 밴드’ 활동을 했다. 당시 유정고 밴드는 노동조합과 이주노동자들의 공연 무대에 오르고 대학로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지금 하는 일과 민중가요는 다른 맥락이다. 투쟁의 삶을 반추하고 새날을 예비하는 노래를 만들고, 일상의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지금은 이 일을 하며 내가 가졌던 여러 의문들을 천천히 풀어가고 싶다.”

현재 안석희씨는 민중가요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산업폐기물을 자르고 깎고 녹여 악기를 만들면서 민중가요의 대안을 찾으려는 것도 아니다. 일부에서 재활용상상놀이단과 민중가요를 같은 연장선에서 바라보려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실제로 민중가요 진영에서 록음악을 수용하는 양식 실험을 했던 것과 재활용상상놀이단에서 추구하는 실험적 퍼포먼스는 전혀 다르다. 물론 1992년 ‘천지인’이 민중 록을 전면에 내세운 뒤 민중가요에서 록음악 양식이 일반화됐듯이, 재활용 악기로 연주하는 것도 사람과 세상의 관계를 깨우치는 음악으로 떠오를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안석희씨가 20년 가까이 민중가요와 더불어 지내는 동안 노래운동은 적잖은 부침을 겪었다. 1980년대 중반 민중가요의 개념이 ‘민족적 형식에 민중적 내용’이라는 말로 거칠게 정의되면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이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큰 성공을 거두고, 1990년대 노동가요의 종갓집 ‘꽃다지’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민중가요는 투쟁의 도구에서 일상의 문화로 자리잡을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꽃다지를 중심으로 민중가요의 수용자를 넓혀가며 최초의 노동가요 합법 음반을 내놓는 등의 성과에도 1996년 12월20일 ‘민중가요는 죽었다!?’라는 주제로 노동문화 포럼까지 열렸다. 이 포럼은 민중가요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확보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를 전후로 노래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개인의 목소리로 대중을 만나고, 민중가요가 ‘프리다 칼로’ 같은 인디 밴드를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안치환·권진원 등의 대중적 성공을 모델로 꽃다지의 류금신·서기상·윤미진, 노래마을의 이정열·이지상, 민중 록그룹 천지인의 손현숙 등이 솔로 활동에 나선 것이다. 이들이 일상적 영역에서 문화의 향유라는 의미에서 민중가요의 ‘운동색’을 탈색하는 동안, 안석희씨는 김호철·윤민석씨 등과 함께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을 다했다.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지는 구심점 구실을 하면서 민중가요의 음악적 층위를 두텁게 만들었던 것이다.

송앤라이프, 인터넷과 mp3도 활용

여전히 21세기에도 민중가요는 진화하고 있는 것일까. 이전의 <단결투쟁가>나 <세상을 바꾸자>처럼 노래 한 곡이 집회나 시위 등의 공간을 통해 3개월이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양상은 시들해졌다. 반면 민중가요가 환경과 여성·교육·생명 등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면서 일상에 더욱 깊이 들어오게 됐다. 노래를 예술작품으로 바라보면서 민중성·노동자성 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창작의 고민을 더욱 다양한 양식으로 풀어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대 민중가요의 대표곡들을 내놓은 안석희씨 역시 새로운 소통 방식을 찾아야 했다. 일상에서 음악적 편린을 재발견하면서 새로운 소통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은 노래를 하는 문화 노동자들이 흩어져서 하나를 모색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를 중심으로 노동문화의 공공적인 유통 구조를 모색하면서 민중가요를 표방하는 개인과 단체가 40여개로 늘어나기도 했다. 꽃다지 대표를 지낸 문화예술일자리만들기 중앙사업단 이은진 국장은 “예전에 대형 확성기로 대중을 모았다면, 요즘은 소형 마이크로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하는 양상이다. 새로운 단체와 가수들이 나오고 대학 노래패 출신들이 다시금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민중가요 수용자들이 <내일의 노래> 같은 오래된 노래를 재해석하고 율동이 어우러진 무대가 많아졌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민중가요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치르면서 때 아닌 호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재벌기업의 이미지광고에 민중가요의 고전 <그날이 오면>이 흘러나오고 대기업의 광고에 <천리길>이 앙증맞은 목소리로 울려퍼지기도 했다. 마치 민중가요가 건전가요로 거듭난 것처럼 보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기에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한 국민을 위무하던 희망가 구실을 한 <상록수>와는 또 다른 의미였다. 게다가 3인조 혼성댄스 그룹 ‘거북이’가 <사계>를 힙합과 경쾌한 하우스 버전으로 리메이크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언더그라운드 힙합 가수 ‘MC 스나이퍼’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샘플링한 데뷔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민중가요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데는 변형·재해석과 함께 새로운 소통 방법의 영향이 적지 않다. 인터넷과 MP3가 민중가요의 첨단 미디어로 떠오른 것이다. <전대협 진군가>를 만든 윤민석씨가 중심이 된 ‘송앤라이프’가 이를 적극 활용했다. 이들은 민중가요의 맥을 계승하면서 변화된 시대의 대중 정서에 부합하는 음악을 ‘청년음악’이라 하면서 시의성 있는 노래를 내놓았다. 일부에서 ‘시사가요’ 또는 ‘전술가요’라고 말하는 송앤라이프의 노래는 민중가요의 관점에서 인터넷의 기동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솔크레이크 동계 올림픽의 분노를 <fucking usa>로 귀를 사로잡거나 일본의 야욕을 <마지막 경고-섬나라 원숭이들에게 고함>에 새기는 식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아시아로 전파하네

시의성을 염두에 두고 급박하게 만든 노래가 민중가요 레퍼토리로 남기는 힘들다. 다만, 실천의 미덕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음악적 미학으로 풀어낸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민중가요를 접하지 않은 누리꾼(네티즌)들이 상업적인 대중문화 밖에 다가설 통로를 마련한 점도 평가받을 만하다. 송앤라이프 윤민석 대표는 “의미나 명분과 대중성 등을 모두 이루기는 힘든 현실이다. 민중가요의 맥을 유지하면서 대중을 만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장 진출 기회도 없는데 음반에 목을 맬 수는 없지 않은가. 3년 동안의 실험은 민중가요가 살아남을 구조를 탐색하는 기간이었다. 앞으로 모바일 서비스 등 또 다른 생존법을 찾으려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민중가요의 진화 양상은 인터넷 밖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송앤라이프가 변화된 매체 환경을 흡수해 민중가요의 대중화에 나선 동안 노래꾼들의 용트림이 각자의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지난 4월1일부터 10일까지 홍익대 앞 롤링홀에서 열린 ‘2005 노래마라톤-여섯 줄의 삶과 여섯 날의 진실의 노래’는 소리 없이 성장한 민중가요의 오늘을 실감나게 들려줬다. 지난 2월 노동문화기획자네트워크가 출범하면서 2001년 ‘따로 또 같이’, 2002년 ‘일상의 치열함을 노래하라’의 뒤를 잇는 노래마라톤은 민중가요의 어제와 오늘을 통해 다양한 양식으로 거듭날 내일을 예감케 했다.
만일 민중가요를 추억의 노래쯤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노래마라톤에서 색다른 감흥에 빠져들었으리라. 이번 노래마라톤에는 1980년대부터 민중가요의 씨앗을 뿌린 팀에서 2000년대 들어 결성된 팀까지 모두 11개 팀이 무대에 올랐다. 그만큼 다양한 색깔의 노래가 어우러져 민중가요의 진폭을 확인케 했다. 여기엔 노찾사의 지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산돌노동자합창단’을 잇는 ‘햇빛세상’과 민중 록의 13년 내공을 간직한 ‘천지인’, 대학 노래패 출신의 ‘노래모임 아줌마’ 등이 지난 날의 추억을 자극한다면, 민중가요의 맥을 관통하는 연영석, 경쾌한 록으로 귀를 사로잡는 ‘A.K 프로젝트’, 생명을 노래하는 박창근, 해금과 기타의 어울림이 돋보이는 ‘449프로젝트’ 등을 통해 새로운 흐름을 살필 수 있었다.
이렇듯 민중가요는 소리의 세기를 줄였지만 다양한 화음으로 일상에 파고들고 있었다. 다만, 소통의 창구가 드러나지 않았기에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을 뿐이다. 심지어 이주노동자 밴드 ‘스톱 크랙 다운’은 민중가요의 지평을 아시아권으로 확대하면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 일상의 언저리를 노래의 중심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 민중가요의 다양한 색깔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지 않다.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신문방송학)의 경우 “그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민중가요가 활로를 찾아가고 있다”고 보지만, 송앤라이프 윤민석 대표는 “일찍 대중을 생각하고 다양성을 고민하지 못한 게 아쉽다. 하지만 저마다의 색깔을 찾는 게 민중가요의 마지막 불꽃이 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다양한 화음 선보일 무대 확보해야

다시 문제는 민중가요를 어떻게 규정짓고 수용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대형 집회장에서 집단의 힘을 보여주는 민중가요를 고집하기엔 역부족인 형국이다. 개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이 다가올 수도 있다. 지금 다양한 개성을 뽐내는 민중가요가 더욱 품을 넓히기 위해서는 소통의 공간이 온·오프라인 구별 없이 확대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오는 5월13일부터 열리는 꽃다지의 ‘2005 봄 콘서트’ 같은 집단의 장이 더욱 풍요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올해만 세 차례 열릴 예정인 노래마라톤이 민중가요 소통의 장으로 굳건히 자리잡는다면 언젠가 안석희씨가 전혀 새로운 음악으로 무대에 오를 수도 있으리라.



4인4색, 혼자도 외롭지 않아요

[민중가요의 얼굴들]
어쩌면 민중가요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치열한 투쟁의 현장에서 불리던 민중가요는 형식적으로 단순하고 내용적으로 비장했다. 그런 시절을 지나 경쾌한 몸짓과 함께하던 민중가요가 대중과 편안한 자리에서 만나고 있다. 여기엔 집단의 틀로 담아내지 못하던 개인의 자유로움이 오롯이 담겨 있다. 때로는 턱없이 무거웠던 색깔을 지워내고 대중의 눈높이에 한 걸음 다가서기도 한다. 주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발표하며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4인의 가수를 소개한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이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박창근


대학 시절 정태춘의 노래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대구에서 1993년 그룹 ‘우리여기에’로 활동을 시작해 1998년부터 솔로로 나섰다. 여린 감성의 소유자로 독특한 음색에 일상의 이면을 살피는 노래를 실어 전한다.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1인 녹음 시스템을 갖추고 홀로 음반을 제작하기도 한다. 채식주의자로서 생명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표현하는 노랫말이 인상적이다. 요즘 그는 결식 청소년을 위한 자선공연을 하고 있다.
음반: 1집 <반신화>(1999), 2집<박 창 근>(2005)
홈페이지: www.artmusician.com

박향미


1994년 꽃다지에 입단해 본격적으로 민중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꽃다지 단원으로 <노동가요 공식 음반> <꽃다지 2집·3집>과 꽃다지 싱글 ‘오라’ ‘반격’ 등에 참여했다. 그동안 연평균 200회가 넘는 공연을 통해 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우리가 되어 커다란 진보의 날개를 달고 시대를 날아가고자 한다. 꽃다지 8년 경력에도 1집 음반을 낸 신인가수라 ‘우기며’ 서로 손을 잡고 사막을 건너려고 한다.
음반: 1집 <붙어>(2002)
홈페이지: pparkhyang.com

연영석


미술대학 조소과 출신으로 진보 미술동인 ‘현실감각’을 창립한 문화노동자다. 록밴드 ‘메이-데이’에 노랫말을 제공하면서 음악계에 발을 뻗어 1997년 자작곡 <라면>을 발표했다. 시대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정신을 올곧게 간직한 민중가요의 진영의 대표주자. 그는 깨어진 자신을 위해 무심코 던진 노래가 스스로에게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세상을 향한 비뚤어진 시각, 그것이 그를 그답게 한다.
음반: 1집 <돼지 다이어트>(1998), 2집 <공장>(2001)
홈페이지: www.lazyblood.com

윤미진


대학에서 노래패와 민족극회에서 활동했고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1992~94)과 ‘꽃다지’(1994~98) 단원으로 수많은 공연에 참여했다. 솔로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려는 마음을 노랫말에 살포시 드러낸다. 이를 통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을 진실로 채우려는 것이다. 요즘 3집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
음반: 1집 <윤미진의 착한 노래>(1999), 2집 <회로>(2002)
홈페이지: www.simzi.co.kr



</fucking>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